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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7대 불가사의 vs 세계10대 불가사의

서원365 2008. 8. 13. 14:22

 

 

 

 

 

 

 

 

          세계7대 불가사의  VS  세계10대 불가사의

 

 

 

 

 

 

 

지구상의 불가사의한 것들을 모아서 이르는 말로 7대, 8대, 10대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10대불가사의를 열거해보면,

 

 1.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

 2. 스톤헨지(Stone Henge)

 3. 아틀란티스 제국

 4. 시베리아의 대폭발

 5. 나스카의 지상 그림

 6. 죽음의 삼각해역

 7. 미스테리 써클(Mystery Circle)

 8. UFO사건(외계인)

 9. 만리장성

10. 네스 호의 괴물 입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1. 피라미드,

 2. 공중정원,

 3. 에페수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4. 올림피아의 제우스(Zeus) 신상(神像),

 5. Rhodes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巨像),

 6.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러스 영묘(靈廟),

 7. 파로스(Pharos) 등대'의 고대건출물인 고대세계7대불가사의와

 8. 미국의 그랜드캐년,

 9. 진시황릉의 병마용,

10.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10대불가사의라고 하였습니다.

 

 

 

7대불가사의가 연대와 기준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듯이 이것도 구분에 따라 나뉘는 것 같네요.

 

 

고대세계7대 불가사의

①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
②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③영국의 스톤헨지
④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⑤중국의 만리장성
⑥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⑦파로스 등대 

 

 

세계7대 불가사의

①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

②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③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④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⑤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⑥중국의 만리장성

⑦알렉산드리아의 등대

 

 

L.코트렐의 7대 불가사의 

①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

② 테베·네크로폴리스(묘지),

③ 왕가(王家)의 계곡,

④ 시리아의 팔미라 고도(古都),

⑤ 바위의 돔,

⑥ 클라크 데 슈발리에(시리아의 십자군 성채),

⑦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신세계7대 불가사의

 

 

 

 

스위스의 베른하르트 베버는 얼마 전 ‘신 7대 불가사의 재단’을 설립해 인터넷을 통해 7대 불가사의 후보를 발표했는데요,

7월7일 7시7분에 최종 발표되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콜로세움

페트라

앙코르와트

알람브라 궁전

에펠탑

성 소피아 사원

피라미드

기요미즈 사원

타지마할

노이슈반슈타인성

자유의 여신상

만리장성

스톤헨지

치첸이차 피라미드

팀북투

크렘링궁

그리스도상

이스터 석상

마추픽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위의 후보들 가운데 선정되었습니다.

 

 

고대세계7대 불가사의

①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
②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③영국의 스톤헨지
④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⑤중국의 만리장성
⑥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⑦파로스 등대 

 

 

세계7대 불가사의

①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

②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③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④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⑤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⑥중국의 만리장성

⑦알렉산드리아의 등대

 

 

L.코트렐의 7대 불가사의 

①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

② 테베·네크로폴리스(묘지),

③ 왕가(王家)의 계곡,

④ 시리아의 팔미라 고도(古都),

⑤ 바위의 돔,

⑥ 클라크 데 슈발리에(시리아의 십자군 성채),

⑦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애석하게도 우리문화유산은 하나도 후보에 거론되지 않았군요.

 

 

신세계7대 불가사의

①중국의 만리장성

②인도의 타지마할

③ 페루의 잉카유적지 마추픽추

④로마의 콜로세움

⑤브라질의 거대 예수상

⑥요르단의 멸망한 고대도시 페트라

⑦멕시코 마야유적지 치첸이챠 피라미드

 

 

불가사의란 말 그대로 밝혀내지 못한 수수께끼를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거의 대부분의 역사적인 유물들은 그것의 발생년도를 추정하기 위해 많은 조사를 펼치게 되는데,
위에서 열거한 불가사의들은 그러한 추정이 불가능하거든요.

즉, 그 시기에 만들수 없는 유적이란 말이 됩니다.

 

 

 

 

 

 

 

                

                      웅장하고 거대한 세계10대의 불가사의

 

 

 

 

 

 1. 잉카문명의 마추픽추유적

 2.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

 3. 중국의 만리장성

 4.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

 5. 영국의 스톤헨지

 6.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7. 중국의 진시황릉

 8. 로마의 콜로세움

 9. 인도의 타지마할 

10.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1. 잉카문명의 마추픽추유적

 

 

 

 

 

마추픽추유적

페루 남부 코스코시 소재하는 페루 남부 코스코시의 북서쪽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잉카

유적지.주위를 둘러싼 뽀족한 봉우리들이 마추피추를 외부 세계와 격리시키고 있다.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있는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립니다.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이 발견한 곳으로,
1534년 정복자인 에스파냐인을 상대로 저항했던,
만코 2세 이하 사이리 토파크, 티투 쿠시, 토파크 아마르등 잉카가 거점으로 삼았던 성채도시로 추측되는 곳 입니다.

 

돌의 도시, 태양의 도시, 공중 도시, 달의 도시.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장구한 세월동안 세속과 격리돼 유유자적함을 고이 간직한 곳. 그래서 신비하고 풀리지 않는 영원의 수수께끼가 가슴 벅차게 하는 그 곳. 그 기원과 신비함으로 인해 우주적 차원의 예술품으로 불리는 곳. 그러나 분명 잉카의 땅이며, 잉카의 도시인 곳. 제국의 마지막 성전이 벌어지고 그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을 함께한 곳. 잉카 최후의 요새 마추피추.


마추피추의 발견

안데스와 아마존을 헤맨 탐험가 가운데에는 비록 파이치치는 아닐지라도 유적을 발견한 사람도 몇 있다.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관광객을 제일 많이 끌어모으는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발견한 하이럼 빙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잉카인들은 글자·쇠·화약·바퀴를 몰랐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강한 군대를 유지했다.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 갈래 길(잉카 로드)을 2만㎞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통제했다.

황제의 명령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두루 미쳐 새 한 마리도 황제의 명령 없이는 날지 않는다고 했다. 잉카인이 돌을 다룬 기술은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그들은 20톤이나 나가는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 수십 ㎞ 떨어진 산 위로 날라다가 신전과 집을 지었는데,면돗날도 들이밀 틈 없이 돌을 잘 쌓았다(그들이 사용한 가장 큰 돌은 높이 8.53m 무게 361톤이다). 평야가 적었지만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옥수수를 경작함으로써 그들은 넉넉히 먹고 살았고,구리를 쇠만큼 단단하게 제련해 썼는데 그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 제국은 겨우 100여년 만에 스페인 군대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문명과 패망과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 보여 주는 최대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 속의 해발 2,400m 바위산 꼭대기에 남아 있는 옛 도시 맞추픽추이다. ‘

…우리는 비탈에 납작 붙어서 아래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땅에 손가락을 찔러 꽂은 뒤 미끄러운 풀을 밀어 헤치면서 몸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아득한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는 우리가 밧줄을 잡고 건너온 우루밤바강의 성난 급류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디언 안내인이 이 근처에는 사냥감을 뒤에서 공격하는 페루드란스 독사가 많다고 신음하듯이 일러 주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서른다섯살 난 하이럼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한 1911년 7월24일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탐험대는 빙엄과 그의 대학 동료 두 사람,통역과 길안내를 맡은 페루군 하사관 1명,거기에 노새 몇 마리. 그들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빌카밤바를 찾으려고 들끓는 모기와 지독한 더위와 위험한 급류를 무릅쓰고 우루밤바강을 따라 폐허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일행이 빌카밤바 계곡에서 야영하고 있을 때 한 인디언이 나타나 그들의 바로 앞에 깎아지른 듯이 솟은 바위산 등성이에 거대한 폐허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꽤 높이 올라갔는데도 폐허 같은 것은 없었다. 모두가 몹시 지쳤다. 그때 인디언 몇 사람이 샘물을 담은 호리병을 가지고 다가왔다.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고 가슴 가득히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인디언들은 조금 더 가서 산모퉁이를 돌면 폐허가 있다면서 한 소년을 딸려 주었다….’ 빙엄 일행이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과연 잉카 시대의 계단식 경작지가 보이고 돌 건축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계단 같은 것을 몇 단 겹쳐 쌓은 큰 건축물은 나아갈수록 더 많아졌다. 모두 길이 30m가 넘는 돌벽이 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한 건축물의 끝까지 걸어가니 맞은편 나무가 이끼 낀 돌벽에 솟아 있었다. ‘엄청나게 큰 돌들이 서로 꽉 맞물려 있었다.

그 벽은 가옥의 일부였다. 벽은 옆에도,그 맞은편에도 있었다. 바위 선반 아래에 동굴이 있었다. 벽에 벽감이 나란히 설치된 왕족의 무덤이었다. 그 위쪽에는 쿠스코에 있는 태양의 신전처럼 바깥 벽이 경사진 반원형 건물이 있었다. 돌계단은 광장으로 이어졌고,거기에는 흰 화강암으로 지은 대사원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맞배지붕 건물이 제사장의 주거주지였으리라. 비탈 아래에는 건물들이 미로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안데스산 중에 해발 4,570m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산. 그 중턱에 만여명이 살 수 있는 비밀 도시가 있었다니! 바퀴를 모르던 잉카인들은 흙과 돌을 사람이 지고 날라다가 이 도시를 세웠다. 길이가 수백m나 되는 축대를 100개나 쌓고,거기에 흰 화강암을 빈틈없이 이어 쌓은 벽과 집들. 샘에서 수돗물을 끌고,계단식 밭을 일구어 외부의 도움없이 살 수 있도록 신전과 묘지까지도 갖춘 완벽한 도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깥 세상과 소식을 끊은 채 수십 년 동안 살다가 늙어 죽은 듯했다. 어떤 군대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3면이 낭떠러지인 이 요새는,그 뒤로 400년 동안이나 사람 그림자가 얼씬하지 못한 채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었다.

빙엄은 빌카밤바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의 옛 도시가 스페인군에 쫓긴 잉카의 황제의 피난처이자 저항의 근거지로 삼은 최후의 수도라고. 산 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요새. 바위산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천여 명이 상주한 자급자족 도시. 빌카밤바 계곡 일대에 흩어져 있는 만여 명을 관장한 거점 도시. 신전 중심의 시설로 가득한 신성한 도시. 마추픽추는 누가 세웠고 언제 버려졌을까.


잃어버린 도시 마추피추

이 도시는 1911년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 되기 전까지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잃어버린 도시" 혹은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공중 도시"라고 불린다. 총면적 5㎢. 도시 절반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페루는 수도 리마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마추피추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 있을 때가 많아 산 아래에선 이 도시 존재를 확인하기 힘들다.

유명한 미국 대중가수 "사이먼&가펑클"이 불러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 " 엘 콘도르파사(El Condor Pasa)"가 페루 민요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특히 팬플룻으로 연주될 때 이 곡의 진가가 발휘된다. 원래 페루 원주민이 팬플룻으로 많이 연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추피추에 올라서면 구름에 가리워진 마추피추 성벽 한 모퉁이에서 원주민 복장을 하고 팬플룻으로 이 곡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 마추피추의 신비함 때문인지 아니면 구름 속에 가려진 탓인지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마추피추 과연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2.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

세계 제7대 불가사의. 기원전 2500년 경에 건축. 높이 137m. 무게는 3통에 가가운 돌덩이가 230만 개나 쌓여 있다. 기자고원에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이다.

 


쿠푸왕의 피라밋의 예를 들어봅니다.

피라밋은 왕의 무덤이고, 그 형태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피라밋이 여럿 발굴되었을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문명과도 연관됩니다. 피라밋도 하나의 건설구조물이라고 친다면,

모든 문명은 발전이 되지 퇴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쿠푸왕의 피라밋보다 최신의 피라밋이 오히려 더 형편없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피라밋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어떻게 문명이 퇴보할수 있을까? 의문점이었죠.
게다가 쿠푸왕의 피라밋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돌의 크기를 보면 엄청난 크기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현대의 절단기술(돌을 잘라내는 기술-매우 정밀한 칼이나 다른것들로 절단)에 맞먹는 절단술로

그 거대한 돌들이 잘라졌다는 겁니다. 무슨 레이져로 잘라낸것처럼 말이죠.

그 시대 문명기술로는 어림없는 기술입니다.

또 하나 그 돌 하나의 무게를 산출해 볼때 그것을 그 엄청난 높이까지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현대조선소에서 배를 들어올릴때 사용하는 골리앗크레인으로도 벅차다는 겁니다.

만일 무식하게 밑에 나무를 깔고 돌을 밀었다라고 한다면 그 돌을 끌고 올라갈수 있게 경사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돌의 무게를 지탱할만한 경사면이 갖춰줘야하고(아니면 붕괴되겠죠),

이러한 경사면을 만드려면 피라밋에 몇배에 달하는 산을 주변에 둘러 만들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산을 만드는데는 수백년이란 시간이 소요됩니다. 좀 말이 안되죠?

마치 돌을 크레인이나 손으로 번쩍 들어 놓은것처럼 실제 피라밋의 돌의 위치의 오차의 정도는 매우 높답니다.

(측량결과 현대의 기술로해도 이정도의 오차가 나오기 힘듦)  

 

-피라미드-
번호순대로 붉은 피라미드, 굴절피라미드, 계단식 피라미드, 외벽이 붕괴 된 피라미드
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조한 기념비적 구조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타이·멕시코·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몇몇 섬에 지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기 원-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터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岩窟)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의 피라미드 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터바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竪穴)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터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 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플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이 남쪽에는 계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었다.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돌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피라미드의 6대 비밀

 

 1. 세계의 중심에 위치-세계 대륙을 4등분

피라미드의 대명사는 이집트 쿠프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피라미드(기원전 2천5백년 추정).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연구를 수행한 피라미드다. 대피라미드 옆에는 쿠프왕의 아들과 손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개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있고, 왕비의 무덤이라는 작은 피라미드 6개가 3개씩 2줄로 배치됐다.

이 9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한 기자 지역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여러 면에서 지리학적인 ‘중심’이라는 점이다. 먼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수직선(동경 31도)과 수평선(북위 30도)을 그리면 전세계 대륙 면적이 거의 4등분된다.

또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끝부분을 원호로 연결할 때 대피라미드는 원의 중심에 위치한다. 이곳은 고대의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피라미드가 세계의 어떤 ‘중심’이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2. 현대 기술이 손 든 정밀성-밑변을 높이로 나눈 값은 π/2
대피라미드를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먼저 대피라미드의 엄청난 규모에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건축학적 정밀성을 확인하고 감탄하기에 이른다.

대피라미드의 네변 길이는 모두 2백30m 정도. 평균 2.5t의 무게와 어른 키만한 돌로 이렇게 길게 받침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각 변의 길이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숫점 첫째 자리에서 값의 차이가 날 뿐 거의 비슷하다. 또 각 밑변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고 밑변의 각 모서리가 90도를 이루는데, 무시할 정도로 오차가 작다.

현대의 건축학자들은 이런 정밀도를 가진 거대한 건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밑변 하나의 길이를 높이(1백46.6m)로 나눈 값은 1.57. 원주율(3.1416)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수치까지 고려된다면 피라미드의 건축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 것이다.


 3. 지구 크기를 상징한다-43200의 비밀
과학자들은 대피라미드에서 측정된 각종 수치들을 여러모로 연관시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대피라미드에 숨겨진 천문학적 수치가 드러났다.

먼저 과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독특한 단위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재 보편적으로 알려진 1피라미드 단위는 지구의 남북극 거리를 2천만으로 나눈 수다. 이 단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밑변 하나를 이 단위로 나눈 값은 약 365. 잘 알고 있듯이 이는 1년의 날짜다.

지구의 세차 운동과 연관된 수치도 발견됐다. 지구의 적도 둘레는 약 4만75km, 반지름은 약 6천3백78km. 그런데 이를 ‘4만3천2백’으로 나눠 보니 이상한 값이 나왔다. 먼저 적도둘레를 나누면 약 9백27m가 산출된다. 피라미드 네변의 합과 거의 유사한 값이다. 또 지구 반지름을 나눈 값은 약 1백47m. 피라미드 높이에 거의 일치한다. 피라미드의 둘레와 높이가 지구의 크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문제는 ‘4만3천2백’이란 값이 어떻게 산출된 것이냐는 점이다.

이 값은 세차 운동에서 발견되는 특정 값인 ‘4천3백20’을 10배한 수치다. 세차 운동은 지구 축이 약 2만6천년을 주기로 3백60도 회전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한 학자가 지구가 60도를 이동하려면 약 4천3백20년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침 4만3천2백을 비롯해 4천3백20, 4백32와 같은 수는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해 학자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4만3천2백’이란 수치를 피라미드 둘레와 높이가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데 사용했다.


 4. 왕의 방에 담긴 수수께끼-북극성 관측 위해 오차까지 고려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장소는 일명 ‘왕의 방’이다. 밑면에서 3분의 1 떨어진 곳에 위치해 면도날을 재생시키고 부패를 막는 등 ‘피라미드 파워’를 일으킨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떤 수치들이 숨겨져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왕의 방’의 가로와 세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건축 구성 비율이1:1.618, 즉 황금비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흔히 황금비는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알려졌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건축된 피라미드에서 나타난 것이다.

황금비는 사람의 눈에 가장 조화스럽게 인식된다고 알려져 건축, 조각, 회화 등 예술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직사각형은 두변이 황금의 비로 분할돼 있을 때 가장 정돈된 느낌을 준다.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는 명함이나 담배갑, 엽서가 이 비율를 따라 만들어다.

기하학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값들도 발견된다. 피라미드를 왕의 방 밑바닥 방향에서 수평으로 자르면 수평면 면적이 피라미드 밑변 면적의 절반과 일치한다. 방 밑바닥의 대각선 길이는 피라미드 밑변 하나의 길이와 같다. 게다가 옆변 길이는 밑면 대각선 길이의 절반이다. 한편 왕의 방 북쪽 벽에는 비스듬히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가느다란 통로가 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북극성을 관찰하기 위해 만든 통로라고 주장했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당시의 별자리를 고려한다면 이곳에서 북극성을 보기 위해 피라미드는 정확히 북위 30도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피라미드의 위치는 북위 29도58분51초. 이 오차는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 한편으로 북극성에서 발하는 빛이 공간에서 굴절되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약간 뒤에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관찰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근소한 오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5 .새로운 기원설-오리온자리와 일치
대피라미드가 설립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쿠푸왕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기원전 2천5백년 경에 설립됐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기원전 5세기)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한 승려로부터 듣고 기록한 내용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 헤로도투스가 잘못 알았다면 우리의 상식도 잘못된 것이다.

새로운 해석이 천문학 분야에서 제기됐다. 단서는 쿠푸왕과 아들, 손자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세 피라미드의 위치가 오리온 별자리 가운데 세 별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제시됐다(그림 3). 현재 이 세 별은 기자의 남쪽 하늘에 있는데, 아래쪽 두 별(알 니탁, 알 닐람)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세 번째 별(민타카)은 그 선에서 약간 왼쪽, 즉 동쪽 방향으로 어긋나 있다.세 피라미드와 유사한 배치였다.

이 점에 착안한 어떤 천문학자는 피라미드를 만든 시기가 혹시 이 별들이 피라미드의 바로 위에 떠있던 때가 아닐까 추측했다. 이를 가정해 계산한 결과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약 1만4백50년이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 시기에 하늘의 은하수는 나일강의 위치에 거의 중첩돼 펼쳐져 있었다.

대피라미드 옆에 선 거대한 돌덩이 스핑크스도 이런 추측을 강화시켰다. 사자 모양을 한 스핑크스가 바라보는 쪽은 정동 방향. 태양은 낮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에 정동에서 뜬다. 고대인들은 보통 춘분점을 천체 시스템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이때를 태양의 1년 주기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파악하고 다른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왜 사자모양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춘분에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별자리의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스핑크스가 만들어진 당시 정동 방향에 사자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기원전 1만9백70년에서 기원전 8천8백10년 사이. 피라미드가 1만4백50년 경 만들어졌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수치다.


 6. 공간의 미학, 황금비-자기 유사성 가진 조화
‘왕의 방’에서 발견된 황금비는 12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가 발견한 수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피보나치 수열은 연속적으로 배열된 수에서 앞의 두 숫자를 더해 다음 수가 배열되는 방식에 따른다. 즉 1, 1, 2(1+1), 3(1+2), 5(2+3), 8(3+5)…의 형태다. 이때 뒤로 갈수록 ‘앞의 수:뒤의 수’가 황금비와 유사하게 일치해간다.

황금비의 성격을 기하학적으로 풀면 다음과 같다. 왼쪽과 같이 먼저 하나의 직사각형을 그린다(변의 길이 a, b). 다음 긴변(b)으로 이뤄진 정사각형을 그려 붙인다. 여기다 a+b, (a+b)+b, (a+b+b)+b…인 정사각형을 계속 붙여 나간다. 이때 모든 직사각형에서 두변의 비율이 항상 최초의 직사각형 변의 비율(a:b)과 같을 수 있는데, 그 비율이 바로 황금비다. 이처럼 황금비는 자기 유사성을 가진다.

황금비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예를 보자. 정5각형의 대각선을 두 개 그릴 때 각 대각선은 황금비로 나뉜다.

 

 

 

 

 


 

 3. 중국의 만리장성

 

 

 

만리장성

총연장은 약 2,700km. 중국의 거리 단위 리(里=0.5km)로 환산하면 1만리를 넘기 때문에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10여 년 간 쌓았으며, 현재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성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개방하는 곳 중에 많이 찾는 곳은 팔달령(八達嶺)·모전욕·사마대(司馬臺) 장성 등이다.

 

사람의 시각에 의한 물체 인식 조건이 가장 좋은 상태를 전제로 할 때 일반인이 평면에서 10m

크기의 물체를 알아볼 수 있는 극한 거리는 36㎞예요 이는 지상 100㎞ 높이의 우주에서도 같은

크기의 물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거리죠

 

              

 

만리장성의 대부분 구간은 그 너비가 2m 안팎이고, 주요 관문의 성루를 제외한 일반 망대(望臺)와 봉화대라고 하더라도 너비가 5-6m 정도라는 사실을 놓고 보면 우주비행사가 우주에서 육안에만 의지해 만리장성을 인식할 수는 없어요 이는 3명의 중국 우주비행사들에 의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라고 하네요

 

또 일반인이 물체의 입체적 형상을 식별할 수 있는 극한 관찰거리는 약 450m로서 이보다 먼 거리에서는 입체감을 상실해 물체의 3차원적 형태를 식별하지 못하게 되고 물체의 원근도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이들은 그러나 미국의 중국계 우주비행사 자오리중(焦立中. 레로이 차오)이 지난 2005년 우주용 디지털 카메라로 만리장성의 영상 촬영에 성공한 일이나 최근 미국 우주항공박물관에 전시된

'우주에서 본 지구'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위성 원격탐지 기술을 활용하면 우주에서도 탐사가

가능하다고 밝혔어요

 

즉 공간 분해능이 일정한 정도에 달한 원격탐지 화상에는 만리장성이나 그에 상응하는 기타 지표물이 나타날 수 있지만 분해능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원격탐지 장치로는 만리장성처럼 가늘고 좁은 지구상의 물체를 포착할 수 없다고 강조했죠

 

중국의 첫 우주인인 양리웨이(楊利偉)는 지난 2003년 11월 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의 지구

귀환 후 "우주비행중 만리장성을 육안으로 보았느냐"는 CCTV 기자의 질문에 "볼 수 없었다"고

말해, '우주에서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신봉해온 중국인들을

크게 실망시켰었죠

 

한 전국정협 위원은 이같은 양리웨이의 말을 근거로 삼아 2004년 3월 전국정협 10기 2차회의에서, "우주인들이 육안으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내용이 포함된 초등학교 6학년용 '어문(語文)' 교과서의 오류 시정을 요구했으며, 교육부도 시정작업에 착수했다고 밝혔어요

 

그러나 일부 언론은 미ㆍ러시아 우주정거장에서 근무하는 자오리중이 우주용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것으로 밝혀진 만리장성 사진 등을 우주에서 만리장성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요

 

인민교육출판사가 지난 2001년 전국교재심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 펴낸 '어문' 제7책 '장성전(長城전<石+專>)에는 한 우주비행사가 우주선에서 지구를 관찰하던 중 육안으로 2개의 건축물, 즉 네덜란드의 바다 제방과 중국의 만리장성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구절이 들어 있어서 큰 문제가 되고 있어요.

 

 

 

 

 

 

 

 4.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사원

터키의 이스탄불에 소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잔틴양식의 성당.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터키 지배하에서는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5. 영국의 스톤헨지

 

 

 

스톤헨지

거석주()라고도 한다. 영국의 에브벨리, 프랑스의 엘라니크의 것과 더불어 장대한 규모의 스톤서클()의 유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름 114m의 도랑과 도랑 안쪽에 만들어진 제방에 둘러싸여 2중의 고리 모양으로 세워진 82개의 입석()의 뽑힌 자리가 보인다. 중심부에는 2중으로 환상열석과 말발굽 모양의 열석이 둘러쳐 있다. 바깥쪽의 환상열석은 지름이 30m인데 30개의 열석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 순석()을 난간처럼 걸쳐 놓았으며 지름 23m의 안쪽 열석에는 순석은 없다.

다시 안쪽에는 두 개의 입석 위에 횡석()을 놓은 5쌍의 삼석탑이 중앙의 제단석()으로 불리는 네모난 돌을 에워싸듯 놓여 있다. 이 석조구축물의 주축이라고 할 동북부에는 바깔 도랑이 잘리어 4각형의 광장이 부설되었고, 그 중간에 힐스톤이라고 불리는 1개의 돌이 있다.


 

이 구축물들은 건조시기가 각각 다른데 바깥 도랑과 제방 그리고 힐스톤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으로 BC 1848±275년에 건조되었고, 입석류는 BC 1700∼BC 1600년, 중앙의 석조물은 BC 1500∼BC 1400년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스톤헨지가 고대의 태양신앙과 결부되고, 하지()의 태양이 힐스톤 위에서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추었던 시기가 천문학적으로 BC 1840±200년이라고 계산됨으로써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의 결과와 일치하는 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1986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아래는 최신기사 내용입니다.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스톤 헨지의 비밀이 마침내 풀렸다.

분석 결과 이는 원뿔 모양의 거대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톤 헨지의 본 모습이 브루스 베들럼(56)이란 퍼즐 연구가에 의해 완성했다고 영국 일간 메일리메일이 2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브루스는 수년 전 원뿔형 건물 이론을 정립했고 나무와 타일을 이용해 본 모습을 복원한 뒤 최근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톤 헨지는 영국 윌트셔주 솔즈베리 평원에 30개의 열석이 늘어선 고대 거석기념물로, BC 1700∼BC 1400년께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브루스에 따르면 스톤 헨지의 원형 건물은 햇빛이 10개의 문을 통해 내부로 비쳐들어 내부가 하루 종일 밝은 조명을 유지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됐다.

지붕은 들보로 떠받치게 된 구조로, 각각의 들보는 중력에 의해 지탱되며 음향학적 측면에서 완벽한 형태라고 그는 설명했다.

남아있는 30개의 열석은 외벽을 감싸고 있는 기둥이다.

브루스는 이 원형 건물이 종교적 용도라기 보다는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는 권력자들의 건물에 더 가깝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없어져 버린 숱한 건물 조각들을 짜맞추는 퍼즐 맞추기 과정을 거쳐 원뿔형 건물의 모형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6.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앙코르와트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중반경에 건립되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하지만, 반영구적 사원은 아니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 ·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7. 중국의 진시황릉

 

 

 

진시황릉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 시황제(B.C 210년 사망) 의 능묘로 1974년 처음 발굴됨. 이 능묘에는 적갈색의 병마용(兵馬俑)들이 대열을 이루어 둘러싸여 있었는데 크고 작은 병사들의 모습과 병마, 무기들이 매우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걸작품이어서 큰 역사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8. 로마의 콜로세움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투기장으로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고 하며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건설하였다. 외벽은 높이 48 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주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를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로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규모가 굉장히 큰 로마의 상징입니다.
80년에 세워졌고 고대 로마의 유적중 가장 큽니다.
아치란 쉽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기술이 있던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맹수와 검투사와의 싸움에,
안에 물을 채워 모의해전까지 벌였습니다.

 

 

 

  

 

 9. 인도의 타지마할 

 

 

타지마할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타지마할전경.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이 세운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

 

-타지마할에 비친 샤자한의 사랑이야기-

한밤중, 샤자한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샹들리에의 촛불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누군가 물이 가득 찬 황금그릇을 코앞에 내밀었다. 왕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목이 말라서 잠을 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뭄타즈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지. 샤자한은 왕비가 황제에 대한 걱정으로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과 한숨 짓는 것을 그동안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뭄타즈 마할이 두 번째의 왕비로서 아그라성에 들어온 것은 17년 전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는 밝은 성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왕비의 품위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늘 밝게 웃으며 매사를 솔선 수범함으로서 대신들과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샤자한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해서, 언제나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술처럼 알아 맞추고는 그를 대신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언제나 황제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그런 여인이었다.

어느덧,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이 있거나 언제나 뭄타즈를 동반했다. 그녀는 심지어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 없이 따라 나섰다. 사랑이란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뭄타즈마할의 헌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두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와 질투를 감수하며 뭄타즈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샤자한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착한 그녀를 혼신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 그 이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런 왕비가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이전과 달리 점점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은 샤자한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 사후 곧바로 그녀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 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 명의 노예들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 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 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놀랄 정도의 섬세한 조각과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은 중앙운하에 한가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본관의 맞은편에 열려있으며,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이여. 가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죽은 후 2년 동안 그 앞뜰에 임시로 묻혔던 뭄타즈마할은 바닥 공사가 끝나면서 바로 타지마할의 지하에 옮겨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날, 샤자한은 성대한 행사를 갖고 뭄타즈마할의 영혼을 다시 위로했다. 죽은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전의 왕비를 사랑하는 샤자한의 눈에 뭄타즈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었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움은 다시 고통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타지마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 조부인 악바르 대제 시절의 한때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로 6개월간의 휴가를 떠난다. 샤자한이 대리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시피 했으므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성자 시크리의 초라한 무덤을 대규모의 대리석으로 증축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였다.

그는 뭄타즈마할이 없는 아그라에 머물기보다는 외부에 출타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윽고 조부 후마윤의 수도였던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샤자한은 장차 이슬람세계의 끝까지 그 명성을 떨칠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 이른바 '랄킬라'를 짓기 시작했다. 성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마마스지드이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30년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 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을 이곳에 갇혀 살던 샤자한은 75세의 나이로 멀리 야무나강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라 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은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아그라 성채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멀리 떨어진 타지마할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샤자한의 애절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논하려면 아그라를 먼저 가 보라. 사랑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아그라는 그런 곳이었다.

 

 

 

 

 

 

 

10.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피사

피사 대성당 동쪽에 있는 종탑이다. 1173년에 착공되었으나 3층이 완성된 1274년 전에 기울기 시작했다. 지금도 계속 기울어지고 있다. 갈릴레이가 이곳에서 새털과 쇠공을 떨어뜨려 낙하실험을 했다.

 

최근 우리나라 불국사에 있는 국보 20호, 21호 석조문화재인 다보탑(높이 10.4cm), 석가탑(높이 8.2m)이 각각 수직에서 0.6도/10cm, 0.9도/12cm가 기운 것으로 조사됐다. 천년 지난 석조물이 1도 기운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며, 아사달,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으로 그 정도는 묻혀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탑이 기울었다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사의 사탑"이다. 이 사탑은 전 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예술적 가치가 더 높은 작품이 수두룩할 진데, 유독 이 탑이 유명한 이유는 금방 쓰러질 듯 삐딱하게 서있어 동정심과 호기심을 계속 유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탑에서 갈릴레오가 물체의 자유낙하 실험을 한 곳이라는 일화도 갖고 있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지목되어 있기도 하다.

피사의 사탑은 8층이고 높이 56m, 직경 15m, 무게 14,500톤으로 약 200년에 걸쳐 완공됐고, 완공 후 800년 동안 조금씩 기울어 1990년에는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공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 구조물은 완전 실패작이다. 이런 불량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호기심과 상술이 기술자들을 부추겨 국제적인 콘소시움을 구성하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붕괴를 막는다고 난리를 피웠다. 초기 설치부터 복구까지의 과정을 짚어보면 재미있는 사실들이 많이 발견된다.

지금으로부터 829년 전, 탑 착공 시점인 1173년 9월로 되돌아가 보자. 피사는 그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중 가장 강력하였다고 한다. 부유한 상인들이 피사에 "기적의 광장"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그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이 종탑(Bell Tower)이었다. 원초적인 문제의 발단은 점토와 모래로 형성된 연약한 충적토 위에 종탑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사가 3층까지 진행되자 탑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반약화로 인한 부등침하 현상이 나타나며 북쪽으로 기운 것인데, 건축가들은 북쪽 기둥과 아치를 남쪽보다 조금 높게 세워 똑바로 보이도록 잔머리를 썼다. 정답은 그 당시 탑을 즉각 해체하고 지반을 충분히 다진 후 재공사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위치로 옮겨 세웠어야 했다.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건축가들은 얕은 수와 임시 편법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만약 공사를 다시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세간의 재미거리 하나가 없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1178년 4층을 올리기 전에 피렌체 전쟁으로 탑 쌓기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약 100년이 흐른 뒤인 1272년 재개되었다. 이 번에는 심사숙고 끝에 우선 탑 밑의 지반을 다지는 공사부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대편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지반 구조는 남쪽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웠던 것이다. 그러자 건축가들은 4층부터는 남쪽의 기둥과 아치를 더 높게 세웠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을 계속 임시방편으로만 해결하려했던 것이다. 결국 문제점을 안고도 밀어붙여 1278년 7층까지 쌓아올렸다. 탑은 이미 1도나 기울었고 중심에서 0.8m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다 다시 전쟁으로 공사가 80여 년 동안 중단되었다. 1360년경 새로운 건축가들이 나서서 8층에 마지막 종루를 쌓을 때도 탑은 계속 남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번에도 선배들이 썼던 꽁수를 그대로 써먹었다. 기울기를 바로 잡는다고 남쪽에 계단을 6단 추가하는 임기응변을 또 부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같은 공학도로서 의아심과 함께 결말이 어찌 날까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1370년 경, 결국 1.4m가 기운 삐딱한 탑을 준공했다. 엔지니어의 옹고집이 극치를 보여주는 결과다. 틀림없이 그 당시 적절한 정당성을 내세웠을 것이다. 공학의 경우는 계산서와 분석 결과를 들이밀면 누가 딱히 반박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1.6도의 기울기는 무시할 수 있고 눈에도 잘 띄지 않았을 터이니, 아마 기술자들은 분석 결과를 내 보이며 "앞으로 더 기울지도 않고,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정당성을 내세웠지 않았을까? 이 탑은 완공 후 5세기에 걸쳐 매년 평균 1.12mm씩 남쪽으로 조금씩 기울어 탑 아랫부분이 지하 3m까지 내려앉았다. 이 때는 이미 기울기가 5도나 됐고, 탑 상단은 수직선상에서 바깥쪽으로 4.5m나 튀어나와 보는 사람마다 두 손으로 받히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불안한 모습이 됐다. 아랫단 회랑 부분이 흙에 묻히자 1838년 탑 밑동을 파냈다. 문제가 부등침하라 조금이라도 하중에 영향을 주는 행위는 신중히 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탑이 갑자기 0.5도나 더 기울었다. 그 이후 뜨거운 감자가 돼버린 사탑은 누가 감히 손 델 엄두를 못 내고 방치하게 되었다.

거의 100년이 지난 1934년 무소리니 시대에 새로운 기술자들이 나섰다. 지반을 강화해 더 기우는 것을 막는답시고 지하 기초에 361개의 구멍을 뚫고 콘크리트 80톤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결과는 남쪽으로 더 기울게 하고 말았다. 가만히 놔두기나 하지 또 악수를 둔 것이다. 1990년 정밀측정에서 북쪽은 21cm 가라앉은 반면 남쪽은 두 배가 넘는 43cm나 내려앉은 것으로 판명 났다. 5.5도나 기운 것이다. 이탈리아는 다급해졌다. 중요한 관광자원 하나가 사라질 판이니 더럭 겁이나 즉시 관광객의 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게되었다. 위원회는 전 세계에서 14명의 내노라는 전문가를 초빙하고, 이탈리아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어 본격 복구작업에 돌입했다. 직접 보지 않아도 14명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격론을 벌였을까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과학자란 자존심과 고집을 빼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부류니까. 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이 탑은 이미 무너졌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1989년 피사 근처 파비오에 있는 800년 된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돌발사고도 있었기에 더욱 조급해졌던 것이다.

복구공사의 목표가 아주 흥미롭다. "무너지지 않을 정도만 세운다" 즉, 0.5도만 세워 300년 전 기울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공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거래다. 완벽한 복구와 공학자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똑바로 세워야 하는데 사탑의 명목을 지키고 관광객의 호기심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삐딱한 채로 마무리한다는 협상을 한 것이다. 건축할 당시부터 기울었던 탑을 똑바로 세운다는 것은 문화재 훼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웠다. 피사의 사탑은 기운 상태로 있어야만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합의를 본 것이다.

새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서 고심 끝에 제시한 복구 대책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사탑 중간에 강철선을 붙들어매 멀리 고정시켜 더 쓰러지지 않게 해놓고는, 북쪽에 납덩어리를 쌓아 지반을 내리 누른다는 방안이다. 컴퓨터 시뮤레이션을 하고 뭔가 무지하게 복잡한 계산을 했을 것이다. 3년이 지난 1993년에야 660톤의 납덩어리를 올려놓았다. 다행히 사탑은 북쪽으로 조금 돌아왔다. 그러나 몰골이 얼마나 흉측스러웠겠는가. 탑 허리춤에 강철선을 붙들어 매놓지 않았나, 볼품 사납게 납덩어리를 쌓아놓지 않았나. 당장 아름다운 예술품을 흉측스런 괴물로 만들었다고 세간의 비난이 빗발쳤다. 미관을 생각지 않는 공학도의 문제 해결방식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위원회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논란을 거듭한 끝에, 1995년 두 번째로 제시한 대안은 그래도 공학적이다. 탑 기초부위에 콘크리트 링을 두르고 그 링에 10개의 케이블을 달아 지하 45m 깊이의 다진 모래바닥에 고정한다는 것이다. 뭔가 복잡하고 공학적인 게 있는 것 같이 그럴싸하다. 그런데 굴착작업을 하는 도중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기초주위에서 이미 160년 전에 타설된 콘크리트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도중 탑에 연결되어있던 쇠파이프가 잘리면서 그 충격으로 탑이 1.5mm나 기울어 버렸다. 무소리니 시절에 설치된 기초 콘크리트와 여기에 연결된 쇠파이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로 기록불량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다.

1.5mm는 일년에 걸쳐 기울 수치인데 하루밤 새에 까먹은 것이다. 더럭 겁이난 기술자들은 부랴부랴 300톤의 납덩어리를 북쪽에 더 얹었다. 혹 때려다 혹 붙인 격이다. 결국 이 계획은 상처만 남기고 수포로 돌아갔다.

모처럼 공학적인 해결책을 갖고 접근하려던 기술자들은 의기소침해졌다. 또 다시 머리를 싸매고 찾은 방안은 상대적으로 올라간 북쪽 지반의 흙을 긁어내 가라앉히자는 것이었다. 납덩어리로 내리누르던 것을 흙 파내기로 전환한 것이다. 사탑을 붙들어 맨 강철선은 그대로 둔 채, 지반 굴착작업을 시작했다. 직경 20cm로 12개의 구멍을 비스듬히 뚫어 북쪽의 흙을 파내기로 한 것이다.

1999년 2월에 시작한 굴착작업은 기술자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기초를 건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 잘못하다가는 탑이 폭삭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강행한 것이다. 굴착공사 초반에 사탑이 또 기울고 있다는 긴급 팩스를 받고 책임자는 사표를 쓸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보를 분석한 결과, 원인은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강풍이었다. 바람이 불면 기온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사탑은 남쪽으로 더 기운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바람이 멈추고 기온이 올라가자 탑은 다시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참으로 민감한 애물단지다. 지반뿐 아니라 기온, 바람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다행히 흙 파내기 작전은 효과를 보며 2001년 6월까지 계속됐다. 탑의 기울기를 19세기 초 수준(4.1m)으로 되돌려 놓은 상태에서 흙 파내기는 중지됐고, 이는 11년 만에 거둔 대성공이었다. 결국 흙 파내기가 가장 알맞은 공법으로 확인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 방법은 삼척동자라도 생각해 낼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던가? 기운걸 바로 잡으려면 내려앉은 쪽에 흙을 되 메우던지, 아니면 올라간 쪽의 흙을 파내는 방법밖에 없다. 기상천외한 방법만 찾으려는 엔지니어의 복잡한 머리 굴리기로 그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다. 14500톤의 돌탑을 들어올리고 흙을 메울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당연히 파내는 방법 밖에 없는 데, 이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3500만 달러(약 455억원)가 넘는 돈이 투입했고, 수많은 기술인력과 10여 년의 세월이 소비됐던 것이다. 물론 이런 황당한 일들 때문에 기술자들이 먹고산다고 볼 수 있겠지만.

흉물스런 납덩이는 제거됐고, 탑 허리를 졸라매고 있던 강철선도 제거됐다. 2001년 6월에 다시 개방된 사탑을 관광객들이 오르내리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렇게 기울었는데도 왜 안 쓰러지고 있지? 신기하다, 기적이야!" 상술과 결탁한 과학자들의 작전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300년은 안전하다는 주장인데, 아마 과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는 피사의 사탑이 왜 쓰러지지 않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를 놓고 끊임없는 논란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들은 공학적으로는 실패작인 이 사탑을 5배나 오른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라며 계속 몰려올 것이다. 과학자들이 인간의 호기심, 상술과 협상해 불완전 작품으로 얼버무렸으나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성공적인 사례로 인식되어 대대적인 기념 행사도 치렀다.

엔지니어는 계산기에서 나온 결과만을 정답으로 인정하려 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여건과 이용자에 따라 적당한 합의점을 찾는 협상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사탑의 복구 과정을 보노라면 우리 공학도가 철두철미 지키려는 원칙만이 꼭 정답은 아니며, 타협과 모험, 행운이 공존하여야 모두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외의 유물들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다 .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정원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 성벽(城壁)에 건설한 기이한 정원으로 <공중정원(空中庭園)> <낚시뜰>이라고도 한다.

이름처럼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 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각종 기록을 더듬어 보면 그것이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기단(其壇)의 한 모서리의 길이가 100m를 넘었고, 높이 15m의 토대(土臺)를 쌓았으며 그 위에 층상(層狀)의 건조물(建造物)을 세우고, 제일 위의 노단(露壇)은 넓이 60㎡, 높이 105m로 30층 건물 높이와 같았다고 한다.

각 단(壇)마다 거름흙을 운반해서 화단과 수림을 만들어 놓고, 유프라테스강에서 퍼 올린 물을 탱크에 모았다가 관수했다고 한다.

이 피라미드와 같은 노단의 외곽은 공랑(控廊)의 형태를 가졌고 그 내부에는 크고 작은 많은 방과 동굴ㆍ욕실 등이 있었으며, 벽체(壁體)는 벽돌에 아스팔트를 발라 굳혀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단부분을 둘러싼 평지에는 흙을 쌓아 올려 크고 작은 나무를 심어 놓았으며 이러한 노단이 마치 숲에 덮힌 작은 언덕과 같아 보인다.
그것이 바빌론의 평야 중앙부에 마치 하늘에 걸쳐 있듯이 높이 솟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공중정원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 정원은 일명 현수원(懸垂園)ㆍ수하원(垂下園)이라고도 부른다.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처녀와 정절,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인 아르테미스를 모시기 위해 에페수스 사람들이 범국민적으로 건설한 신전으로 기원전 6세기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신전은 높이 20미터 정도로 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127개의 기둥을 이오니아 식으로 세우고 지붕을 이어 만들어졌다.

이것이 세워지고 난 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곳을 방문하여 보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에리스에 있는 라비린토스 등 세계적인 걸작에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원전 356년 10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후세에까지도 유명해질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고의적으로 이 신전에 불을 질렀다.
신전이 불타버리자 디나크라테스는 재건에 바로 착수했는데 이때 에페수스에 살고 있는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의 귀금속을 팔았고, 각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특히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던 알렉산더 대왕은 완성 중이던 이 신전에 마음이 빼앗겨 자기의 이름으로 이 신전을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공언했으나, 이방의 신전을 에베소에 세울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 복구 사업을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삼고,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나 더 크고 빼어난 신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에페수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높이 10미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높이 18미터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나 폭도 파르테논 신전의 두배 정도로 만들었다.
건축 자재는 가장 순도가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대리석 계단을 사방으로 내서 중앙의 홀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250년 경에 완성되자, 곧바로 전세계에 그 규모와 화려함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에페수스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더불어 시가지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으로도 유명하여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페수스 항구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배들과 교역을 위한 상인들로 넘쳤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건축 기술의 수준이 당시로선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기 때문이죠.
파르테논 신전의 기단부를 지탱하는 땅은 우리가 흔히 보는 완전 평면이 아닙니다.

실제론 땅이 가운데로 갈수록 볼록하게 튀어 올라와 있습니다.
이는 착시현상을 이용해 어떠한 날씨나 햇빛의 각도에서도
땅이 평면으로 보이게 하려는 그리스 인들의 지혜였던 겁니다.
이런 기술은 근대후반에 오기전까지도 몰랐던 기술이었기에 불사가의라는 겁니다.

 

 

 

 

이스터섬의 석상 '모아이'

 

일반적으로 크기는 3.5m~5.5m에 달하고 무게가 20톤쯤 되는 것이 많습니다. 가장 큰 것은 90톤에 10m나 되는 것도 있다네요. 게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것 중에는 21m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400~1680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11세기 경에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나뉘는데요,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이 만든 작품이라는고도 하고, 이스트섬이 바다건너 이집트와 교류하여 거석상을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출처 : abba_(아빠)
글쓴이 : 스타일 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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