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절과 교육■/일반자료

[스크랩] Re: 박정희집권기에 대해 잘 아시는분..

서원365 2010. 6. 7. 21:43
  • 박정희집권기에 대해 잘 아시는분..
  • 단순한 업적이나 생애 요약은 아래를 보시면 되구요.. 평가는 좀 어렵네요.. 많은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해야 될 문제인듯도 하구요.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1]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 · 6 · 7 · 8 · 9대 대통령(1963년 ~ 1979년 10월 26일) · 군인 ·교육인 ·정치가이며, 호는 중수이다. [편집] 대통령이 되기 전의 생애 [편집] 어린 시절 (1917 ~ 1932)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를 지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당시 46세)와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당시 45세)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박정희의 위로는 박동희(22세), 박무희(19세), 박귀희(15세), 박상희(11세), 박한생(7세), 박재희(5세)가 있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동학 농민 운동에도 참여했다 하며 처가 문중의 산지기로 호구지책을 삼으며 술로 소일했다.[1] 박정희는 어머니가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45세에 임신한 데다,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다.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박정희는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가끔 큰 누나의 젖을 먹기도 했다.[2] 8세가 된 박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2] 당시 박정희는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소년시절에 교회에 다니기도 했지만[3]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4]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선생님들과 교장선생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님를 설득하여 대구사범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이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합격하였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4] [편집] 교육 활동 (1932 ~ 1940)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 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4]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해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했다. 1937년 4월 1일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5]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6] 박정희가 교사로 근무중인 1938년 9월 4일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출처 필요][7]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쳤다 한다. 음악 시간에는 <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쳤고 기타도 쳤다고 한다. 일본인 동료 교사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하며,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한번은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비하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박정희에게 계속 트집을 잡아 논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에 재학 중 군도를 차고 문경을 방문했을 때, 오가와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교장을 찾는 일본인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등 일본인 동료 교사들과 마찰을 빚곤 했다.[출처 필요][7] 1939년 10월 박정희는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주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는데, 1940년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가 발표되었다. 박정희 는 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240명 합격자 중 15등으로 합격하였다.[출처 필요][8] 보통학교 교사직을 하며 일본인 교사, 일본인 교직원과 계속 마찰을 빚게되자 1940년 2월 박정희는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편집] 청년기 (1940 ~ 1945)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출처 필요][8]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박정희의 동기생으로는 이한림, 김묵, 이재기, 이섭준, 이병주, 이상진, 안영길, 강창선, 김재풍, 김원기 등이 있었다. 오히려 박정희의 동기 이한림은 뒤에 1군사령관으로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려고 하기도 했다.[출처 필요][8] 만군 1기생 중 12명은 간도 용정 에 있던 광명중학 출신들이었는데, 이 선배기수에 박정희의 5·16을 지지한 핵심인물들이 있었다.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등이 그들이다. 그뒤 후배기수로는 김포에 주둔하던 해병여단을 이끌고 선두에서 한강을 건넜던 김윤근은 만주군관학교 제6기출신이었다. 박정희와 주한미군측의 화해를 도왔던 강문봉은 박정희의 만군 5기였다. 그만큼 만군인맥은 박정희의 단단한 기반이 되었으며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5·16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있다.[출처 필요][8] 그 시기에 그는 집안을 따라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다. 1942년 3월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교장이었던 나구모 주이치는 생도가 모인 자리에서 박정희에 대해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한 바가 있다.[9]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미인01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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