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사니 ■/[스크랩] 좋은글

[스크랩] 무명의 불ㅡ 분수대 081023

서원365 2009. 7. 26. 19:32

[분수대] 무명의 불 [중앙일보]

  절집에서 삭발을 하는 데는 다 곡절이 있다. 머리카락은 번민과 욕망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세속적인 번민에 가려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할까 두려워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카락은 그래서 밝음을 가리는 풀이라는 뜻의 ‘무명초(無明草)’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무명은 번뇌의 커다란 뿌리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지 못하는 큰 어둠과 어리석음을 뜻한다. 인생의 고난과 번민을 이끌어가는 열두 가지 연기(緣起) 가운데 으뜸이다. 이런 무명을 제거해야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 불가의 간곡한 가르침이다.

까닭 없이 마음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정체 불명의 불덩이가 있으니 이름하여 무명화(無明火)다. 당나라 때의 재상인 배휴(裴休)가 한번은 절집을 찾았다. 벽에 써 있던 이 ‘무명화’라는 세 글자를 보고 뜻을 물었다. 선승으로 유명한 황벽(黃檗) 선사가 “그것도 모르냐”고 힐난했다.

제 신분의 높음을 내세웠던지 배휴는 “내가 당나라 재상인데 인도의 경전을 어떻게 아느냐”고 대든다. 그러자 황벽 선사는 “무명의 불길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답한다. 배우려는 간절한 마음보다는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 노여움만을 앞세운 배휴의 마음을 가리킨 것.

영특한 이 재상은 금방 알아듣는 모습을 취한다. 그러자 황벽 선사는 “무명의 불길이 이로부터 꺼진다”고 칭찬한다. 상대의 마음을 그대로 가리키는 불가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무명은 눈앞을 가리는 장벽이다. 그것이 깊고 두꺼우면 마음앓이, 즉 정신 질환으로 발전한다. 그로부터 나오는 불길은 제 자신을 태우고, 나아가 사회를 태울 수 있다. 그 무명의 불을 간직한 한 노인에 의해 국보 1호 숭례문이 소실된 게 올해 초다. 이어 엊그제는 한 젊은이가 고시원에 불을 지른 뒤 뛰어 나오는 사람들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불안전성을 보여 주는 ‘묻지마식 살인’의 전형이다.

무명을 없애 마음을 다스리려는 노력은 동양 정신문명의 오랜 주제다. 개인적인 수양의 큰 영역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보여 주는 무명의 정도는 개인적 수양의 차원을 넘어섰다. 까닭 없이 피어나는 이런저런 불길들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는 사회병리학적 차원에서 심각하게 접근해 볼 일이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출처 : 배원기
글쓴이 : 배원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