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여행

러시아 여행

서원365 2014. 7. 31. 16:48

2014년 7월 24일 - 26일

올해부터 러시아는 한국인에 대해 60일간 비자를 면제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여름에 러시아를 여행하는 한국인 수가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오르비타 호텔:우리나라 모텔 수준의 호텔이다. 엘리베이터에 짐없이 4명이 겨우 탈 수 있다.

● 8시간 40분의 비행은 참 고되었다. 호텔에 투숙하였으나, 다리가 아파 자주 잠을 깨었다.상트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는 네바강 하구에 형성된 수많은 섬들을 서로 연결하여 만든 도시이다. 백야는 7월 17일에 끝났다고 한다. 그러나 밤 10시가 되어도 여전히 태양은 지지않고 있었다.

 이 도시는 북극권에서 위도가 불과 7도 떨어져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며칠간이지만 비교적 시원한 곳에서 보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지만, 7월 26일 기온이 32도로 참 더웠다.

 피터 대제(표트르1세) 때는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매우 후진국이었다. 특히 비교적 강한 스웨덴 왕국(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포함) 때문에 바닷길이 막힌 러시아로서는 우선 발트해로 진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피터 대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요새를 세우고 발트해로의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성장한 도시가 이 도시이다. 

네바 강에서 본 피터폴 요새 : 스웨덴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요새이다. 중앙에 있는 첨탑 높이는 121m로써 이 높이가 이 도시의 건물 높이의 제한 높이가 된다고 한다. 첨탑 아래쪽은 성당이며, 그 아래에 창문처럼 보이는 곳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강쪽으로 이끌려 나오게 되면 사형을 당했으므로 강쪽으로 난 문을 '죽음의 문'이라고 한다.

피터 대제는 1709년에 스웨덴을 격파하고 드디어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스웨덴은 몰락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차츰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2세기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으며, 레닌이 죽자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 피터 대제(1672~1725) : 키가 204cm의 거구이지만 얼굴은 작아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도 손바닥이 남았다고 한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가이드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미 러시아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끝없이 유적의 유래를 역사와 결부하여 설명하였는데, 다소 역사적 사실에 대해 부정확한 점이 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싶어 집으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그가 틀린 것이 맞았다. 그는 또 다른 나라와 갈등 상황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하게 설명하곤 하였다.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는 세 가지 축복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예쁜 러시아 아가씨이다. 정말 예뻤다. 동행을 한 최선생은 수시로 예쁘다는 말을 했다. 둘째는 보드카라는 술이다. 보드카는 혹독한 러시아의 추위를 막아준다. 셋째는 흑빵이라고 불리는 호밀빵이다. 호밀빵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비타민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 여름 궁전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피터 대제가 1709년에 스웨덴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1714년에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착공하였고, 150년 뒤에야 건설이 모두 끝났다고 한다. 황제의 여름 거주지이다. 발트해 해변에 바로 붙어 있다. 가이드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서 지었다고 하지만, 착공을 할 무렵 스웨덴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000ha의 넓은 해변에 좌우 대칭형으로 건설하였다. 144개의 분수가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분수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고도차에 따른 자연적인 수압을 이용한다.

여름 궁전 중앙 분수대. 오전 11시가 되자 분수대에서 일제히 물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물기등 높이는 19.5m라고 한다.

 

 

● 러시아 음식은 짜고 신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 음식이 짠 이유에 대해 가이드는 예전에 러시아에서 소금이 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소금이 귀하였으므로 손님들에게 소금을 아끼지 않는 것이 대접하는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식들이 짜다는 것이었지만 납득은 가지 않았다. 추위를 쫓기 위해 수시로 보드카를 마시고, 짠 음식을 먹는다면 고혈압 환자들이 많지 않겠느냐고 모스크바에서 만난 가이드에게 물으니, 러시아 사람들의 수명이 길지 않다고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남자가 평균 60세, 여자가 평균 74세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음식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라스 니콜라이 식당 : 규모가 매우 컸다. 저녁에는 여기서 민속춤 공연이 있었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제정 러시아 때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건물 규모가 대체로 컸고, 간판을 거의 보기 어려웠다. 네바 강에는 옛날에 사용했던 퇴역 군함들을 전시하여 관광 자료로 활용하고 있었다.

네바 강 유람선에서 본 모습 : 도시 전체에 이런 건물들이 즐비하다.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군함 : 러일 전쟁 때 노기 장군이 이끄는 육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러시아군을 격파하였다. 막대한 피해라기보다는 대학살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진격하는 바람에, 전사자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일본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러일 전쟁의 막바지에 러시아 발트함대는 대한해협에서 도고헤이하치로의 학익진 전술에 걸려 49척 중 3척만 겨우 살아남는 참패를 당하였다. 도고는 출전 전에 이순신 영령에게 제발 이기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또한 승전한 뒤 기자가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자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신이라는 것이었다.

 곳곳에 성당이 있었는데, 가이드는 과거에는 천 개도 넘게 있던 것을 정리하고 지금은 250개의 성당만 남겨놓았다고 하였다. 토요일(26일)에 미사를  구경하였다. 성당 내에는 일체의 동상이 없었다. 대신 벽에는 우리 나라 탱화처럼 벽마다 성경과 관련된 그림으로 장식해 놓았다. 문맹자를 위해 성경의 주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것을 이콘이라고 부른다.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이콘을 본다고 하지 않고 읽는다고 한다고 한다. 이 이콘이라는 말에서 아이콘이라는 말이 나왔다.

 러시아종교는 그리스 정교에서 분리된 러시아 정교라고 한다. 미사 장면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성당 내에는 의자가 없었고, 모두 서서 미사를 보고 있었다. 어떤 악기도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듯이 성구를 읽었다. 이것을 아까펠라라고 한다. 성당 규모는 컸지만 미사에 참가하는 신자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도 기독교가 퇴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 궁전(에르미타쥐 박물관) 내부 ;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제들은 박물관을 황제 개인의 자랑거리로 생각하여, 박물관 가꾸기에 열을 올리곤 하였다. 가이드는 이것이 세계3대 박물관이라고 하였다. 대영박물관, 루부르 박물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 외에는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이나 바티칸 박물관, 이 겨울 궁전 등으로 세번째 박물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않는다. 이 겨울 궁전에는 미술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네바 강변의 스핑크스. 돈을 주고 사왔다고 한다. 수염은 권위의 상징이라고 해서 이집트에서 수염을 잘라내고 팔았다고 한다.

 피의 사원. 상트 페테르부르크 곳곳에 이런 성당이 있다.

7월 27일 - 28일

7월 27일 저녁에 기차로 모스크바로 항했다. 개찰할 때 소지품 검색을 하더니, 기차를 탈 때 등록된 이름과 타는 사람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같은 가족들끼리 가까이 앉게 하기 위해 표를 서로 바꾸었던 것인데, 역무원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겨우 승차를 허락하였다. 개찰구에 역무원이 없고 승무원이 한번쯤 확인하는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고 보니 공항에 들어갈 때도 휴대품 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입국 수속도 우리 나라보다 시간이 다섯 배도 더 걸린 것 같았다.

 기차는 시속 200km로 달렸다. 300km로 달리는 KTX보다 많이 느렸고, 의자도 불편해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밤 1시가 되어서야 알파호텔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몹시 피곤하였다.

 

● 현지 가이드는 대학에 다니는 한국인었다. 요점만 재치있게 잘 설명하였다. 미안합니다를 러시아로 이즈브니쩨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20원있지'라고 해도 알아 듣는다고 했다. 감사합니다는 스빠시보.

 붉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는 크렘린궁은 생각보다 좁은 곳이었다. 외국인도 누구나 간단한 절차만으로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까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크렘린궁 내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 : 이 건물 건너편에 있는 인도 아래로만 내려서지 않으면 된다.

크렘린 궁 안에도 여러 개의 성당이 있다. 성모승천성당, 12사도 성당, 미카엘 성당, 수태고지성당 등이 있다. 황제들은 이 곳에서 세례를 받고, 이곳에서 대관식을 하고, 이곳에서 미사를 보며, 죽어서 이 곳의 성당에 묻힌다. 살아서도 황제로 군림하지만, 죽어서도 성당에 묻혀 천국에 가기를 바랐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위층이나 부자들은 교회에 묻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후세계도 보장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때로는 미련스럽게까지 느껴진다.

 크렘린 궁 안에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가 있다. 포환이 대포의 구명보다 더 크니 당연히 사용할 수 없다. 엄청나게 큰 종도 있는데, 제조 과정에서 불이나 떨어졌는데 물을 붇는 바람에 한 부분이 깨져서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한번도 쳐보지 못한 채로 구경거리만 되고 있다.

↑성모승천성당

←한 번도 쳐보지 못한 종, 일명 '뻥종'

 

러시아에는 사회주의 시대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난방 방식을 보면 국가에서 물을 데워 각 가정에 보내주고, 가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금과 사용료가 매우 싸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가정에 있는 전기 사용 계량기 같은 것의 눈금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매두어 일년에 조금만 사용료를 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민소득보다는 생활 형편이 좋다고 한다.

 내가 묵은 호텔에는 각층마다 인력을 두명씩이나 배치하여 비효율적인 인력 관리를 하고 있었고, 일도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관공서에는 들어가보지 않았지만, 공항에서 일하는 모습은 그냥 시간만 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범죄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가이드가 몇번씩이나 당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혼자 다니지 말며, 가방을 뒤로 매지 마라는 것이었다. 소매치기들이 어느 순간에 둘러싸고 빼앗아간다는 것이었다.

 

● 붉은 광장에는 아직도 레닌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우리가 간 날에는 마침 해군의 날 행사를 붉은 광장에서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곳곳에 군인들이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모여 있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경찰이나 군인, 안내원 등 누구에게 물어도 몇시에 행사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붉은 광장 - 역광 사진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그늘 속에 계단이 있고, 그 계단 아래에 레닌의 시신이 있다고 한다.

→ 레닌 광장 바로 옆에 있는 굼백화점 : 국립백화점. 200여개의 점포가 입점해있다. 길게 나란히 세워진 세 개의 3층 건물을 지붕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들었다.

 

 

 

 

 

 

 

 

 

 

 

 

 

 ↓ 모스크바 국립대학

● 모스크바 대학 앞쪽에 참새 언덕이 있고, 또 근방에 한인식당이 입주해 있는 건물이 있다.

 한인 식당 건물에는 세 번 들렀는데, 두 번은 식사를 위해서, 한 번은 무료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여행 뒤 강하게 남은 인상은 물과 화장실이다. 생수 한 병에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1800원정도 하였다. 그리고 무료 화장실이 별로 없었다.

 이런 것을 이상하다고 얘기했더니 일행이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달랐다. 28일에 전승기념관에 갔다. 축구장을 네 개쯤 합쳐놓은 정도의 넓이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적어도 바깥에 화장실이 두어 군데는 있고, 음수대도 최소 두어 곳은 있을 법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무료화장실이 있는 한인식당 입주 건물로 차를 타고 가서 볼일 보았다. 소문에는  팬티를 버려 갈아입은 일행도 있었다고 한다. 물과 화장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런 것을 왜 그렇게 불편하게 해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에는 마을의 조그만 공원에도 웬만하면 화장실은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는 세계적 수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새삼 다시 확인한 사실은 여행지에서는 절대로 과식을 하면 안 되고, 멈추었다 다시 출발할 때는 마렵지 않아도 반드시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승기념관 : 제2차대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95년에 완공한 기념관이다.

 

●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곳은 레닌언덕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언덕이라고 하지 않고 산이라고 한다. 해발 250m의 높이이다. 모스크바가 해발 130m이니까 모스크바 시내보다 120m정도 높은 지역이다. 그런데다 버스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하여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한 곳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참새언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기서 보면 모스크바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참새언덕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햇빛이 따갑고 더워서 오래 머물기 어려웠다.

참새언덕에서 본 모스크바. 가운데의 좀 높은 건물은 신식 아파트인데, 저곳 어느 곳에 안현수 선수가 살고 있다고 한다. 왼쪽 채색된 굴뚝은 공장 굴뚝이 아니라 온수를 만들어 공급하는 곳인 듯하다. 이런 굴뚝이 곳곳에 서 있다.

 

● 27일 저녁에는 국립서커스단 공연을 보았다. 한마디로 재미있고 멋있었다. 러시아 국립서커스단의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직접 관람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체험이 될 것 같다.

 공연은 기술적 수준도 높았지만, 재미있는 공연을 통해 관중을 하나의 분위기 안에 묶는 능력도 탁월했던 것 같다. 지적 재산권 문제로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으로 담아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 28일에는 전승기념관에 갔다가 화장실 문제 때문에 급히 한인 식당 건물로 차를 타고 이동한 뒤 노보데비치 사원에 들렀다. 16세기에 모스크바와 스몰렌스끄의 연합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사원이다. 호루시쵸프 유해가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호수와 건축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곳으로서, 내가 본 러시아 사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다. '백조의 호수'도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녀들만 거주하는 사원이 되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공주(이름은 기억나지 않음)가 정권을 잡기 위해 거사를 했다가 패하여, 공주를 따르던 장군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공주를 사원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체 남성들이 이 사원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수녀원이 되었다고 한다.

노보데비치 사원. 차이프코스키가 '백조의 호수'의 영감을 얻었던 곳이라 한다.

     이 청동 오리는 1991년 대통령 부인이었던 바바라부시 여사가 기증한 것이다.

● 아르바뜨 거리는 처음에 아라비아 사람들이 조성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문화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서울 인사동 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거리 입구에는 맥도날드 상점이 있다. 이곳에는 물건을 사지 않아도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고 가이드가 강조한다. 거리를 지나가고 있으니까 상점의 호객꾼들이 "싸요, 싸요."라고 하면서 우리들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가는 대부분의 장소에서 상인들이 한국말로 우리를 부르면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한국돈 만원"이라고 하는 곳도 있었고, "깎아줘요."라고 하는 곳도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보자마자 한국말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아르바트 거리의 의자에 앉아 쉬면서 지나가는 한국사람들을 보면서 "싸요, 싸요"라고 하면서 장사꾼 흉내를 냈다. 그러면서 같이 웃었다.

 가이드는 특히 이곳 아르바트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다시 강조했다. 

← 아르바트 거리의 악사. 러시아에는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식당 복도 좁은 공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고, 식당에서 식사하는 중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그림을 파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미술과 음악이 생활 깊숙이 베어 있는 것 같았다.

 

● 아르바트 거리를 나와 구세주 성당을 거쳐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 공항으로 향했다.

 아참, 지하철을 구경하기 위해 내려간 적이 있는데, 에스컬레이트 길이가   120m라고 하였다. 꼭 놀이 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핵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지하철을 지하 깊숙이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효과는 있을지 의문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약 1709만 제곱 km이다. 우리나라가 남북 합쳐 22만 제곱km이니까 70배가 넘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니 곳곳에 초원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곳이 밀밭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 그냥 풀밭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자작나무와 소나무 같은 나무로 울창한 수풀이었다. 곳곳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이는 자원 부국이다.

 그런데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한국을 개발 모델로 삼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자기 역할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마음 내면에는 자기의 독재를 개발 독재로 변명하고 미화하려는 심리도 깔려 있을 것이다.

 모스크바 역에서는 한국 역사를 공부한다는 여학생을 만났다, 서울로 가는 중이라는데, 우리 비행기보다 2시간 늦게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영어로 말을 걸어봤지만 아주 기초적인 것 이외에는 통하지 않았다.

← 알까기 인형(마트료시카)

●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보면 어느 가게에나 있는 것이 알까기 인형이다. 인형 속에 조금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고, 그 인형 속에 또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다. 많은 것은 모두 아홉 개의 인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인형이 유럽 인형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농부 부부가 있었다. 둘이는 얼른 아들을 낳고 싶었다. 그래야 대도 잇고 농사일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딸을 낳았다. 그렇지만 첫딸이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두번째도 딸을 낳았다. 아주 조금 서운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여덟째 딸까지 낳았다. 그래서 가장 바깥은 인형은 활짝 웃고 있지만, 안으로 갈수록 찡그린 인형, 울고 있는 인형이 나온다. 그런데 아홉번째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마지막 인형은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문득 딸 아홉을 낳은 경남 어느 마을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경상남도 어느 마을에 만덕(가명)이라는 사람이 막걸리 배달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매우 가난했지만, 처복은 있었는지 가난하지만 아주 예쁜 신부와 결혼했다. 그리고 1년후 딸을 낳았다, 예뻤다. 둘째 딸을 낳았다. 역시 엄마를 닮아 예뻤지만 좀 서운했다. 그런식으로 딸 다섯명을 낳았다. 만덕이가 아내에게 가난한 살림을 생각해서 그만 낳자고 했지만, 아들에 대한 집착이 있던 만덕의 아내는 한번만 더 낳자고 간청하여 여섯째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그리고 2년쯤 지나자 아내가 다시 남편에게 한번만 더 낳아보자고 간청했다. 아내의 성화를 못이긴 만덕은 이번만이라는 다짐을 두고 아이를 갖기로 하였다. 그런데 딸 세 씽둥이를 낳고 말았다.

 소문이 퍼져 군수가 쌀 세 가마니와 아이 신발 세 켤레를 사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똑 같이 생긴 예쁜 딸들이 너무나 신기하고 예뻐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세 쌍둥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자 아버지에게 리어카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자기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막걸리 배달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매일 조르는 바람에 만덕은 어쩔 수 없이 리어카를 사주자, 한 명은 앞에서 끌고 두 명은 뒤에서 밀며 막걸리 배달을 하였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꼭 세 쌍둥이가 배달하는 막걸리만 먹었다. 그리고 자주 용돈을 주기도 하였다. 그 뒤로 만덕이네 재산도 웬일인지 조금씩 불어 가난은 면하게 되었다.

 어느날 서울에 취직하러 간 첫딸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부잣집 아들이 보게 되었다. 미모에 정신이 빼앗긴 그는 결국 청혼하여 결혼하였다. 그리고 맛사위가 된 그는 자기 처제들을 자기가 잘 아는 부잣집 아들들에게 소개하여 마침내 아홉 명 다 매우 부유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명절 날이나 만덕 부부의 생일 날이 되면 고급 승용차 아홉 대가 만덕이 사는 마을로 줄을 서서 들어온다고 한다.

 

● 어떤 여행이든지 출발할 때는 기대와 설레임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역시 집이 좋다고 생각한다. 역시 한국이 좋고 우리 집이 좋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죽을 때까지 여행을 해야한다고 한다면 여행은 결코 즐겁지 않을 것이다.

 

'■ 세상 ■ >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中原紀行(중원기행)   (0) 201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