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사니 ■/일반 종교

신은 무엇인가

서원365 2007. 9. 22. 20:38

  

TOM HONEY의 강론입니다.  아래는 강론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저는 성공회 교구 목사입니다. 저는 20년간 성직자로 일해왔습니다. 이 기간 내내 저는 신의 속성에 관해 탐구하고 고민해왔습니다.

 

도대체 신은 누구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바로 외면해버리지요. 저도 잘 압니다. 신을 믿든 안 민든 대부분 사람들은 신을 아직도 우주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강제하고 명령하는 동시에 모든 일의 원인인 존재, 또 자기 백성들의 수호자인 동시에 믿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로 말입니다. 제 교회 예배에서도 신에게 붇는 가장 흔한 형용사는 ‘전지전능하신’입니다.

 

그러나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해가 지날 수록 이런 식으로 신을 파악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정말 이런 가부장적이고 군림하는 보스같은 존재일까요?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찬양과 예식을 통해 표현했던 것과 같은 존재일까요?

 

최근에 신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한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았고 감싸주고 치유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이 신은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힘없는 약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신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 정의상 지금도 또 앞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종교나 철학도 결국은 의미를 찾는 보편적인 갈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구요. 사실 이런 식의 생각은 오랜 전부터 이른바 ‘진보’적인 신학자 사이에 널리 퍼진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목회자들은 이런 진보적인 생각을 퍼뜨리는 것을 주저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공연히 회중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만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교리를 따르는 대다수의 신도들의 단순한 믿음을 깨뜨리지고 싶지도 않았구요. 그래서 저는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기로 결심하고 입을 다물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달 전, 그러니까 작년 12월에 어떤 해저지진이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습니다. 그 일이 있고 2주후 1월 9일 일요일 예배에서 저는 제 교회에서 강론을 해야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선량하고 또 생각이 깊은 이들입니다. 저는 이들을 대신해서 이들의 느낌, 마음 속의 의문을 말해야 의무를 느겼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만 공적인 역할이 있는 만틈 거기에 합당한 말을 해야했습니다. 이게 제가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남아시아 해일 참사가 나고 나서 저는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쓰신 신문 칼럼을 봤습니다. 제목이 ‘남아시아 비극에 대해서’였는데요, 그 요지는 이랬습니다.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이들이 원하는 것은 신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천재적인 종교 이론가가 나와서 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고 우리가 과연 행복할까요? 더 안전하다고 느낄까요? 신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질까요? 신문의 사진에 나왔던 남자, 죽은 자신의 아이를 안고 있던 그 남자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어떤 일도 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위로를 담은 침묵만이 최선의 반응일 것입니다. 실질적인 도움과 함께요.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도 설교도 신학 이론도 아닙니다. 지금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대주교님 말씀은 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옥스퍼드 교회에 모였던 우리는 비록 먼 곳의 재난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신을 향한 우리의 믿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설명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신에게 해명을 요구한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신이 아니면 섬길 가치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신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은 절망, 슬픔, 신체적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던 영원한 신은 우리 영혼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겪는 아픔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진실이고 또한 당위입니다. 신은 또한 우리의 기쁨과 환희도 알아야 합니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주장이 아주 감동적이 신에 대한 관념을 다시 정립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백 년 동안 기독교를 지배해온 통념은 아버지이자 불변의 창조주의 이미지였습니다. 불변의 존재라는 정의상 고통이나 슬픔을 느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제개는 이 불변하는 하느님이 차갑고 우리에게 무관심한 존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20세기에 겪었던 참혹한 비극 덕분에 사람은 이 불변의 신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참호와 수용소에서 죽어간 몇 백 만의 사람들을 보고나서 사람들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신은 어디에 있었나? 이런 일을 허락하신 신은 대체 누구인가? 대답은 ‘신은 우리와 함께 그 일을 겪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 신은 우리의 섬김을 받을 자격이 더 이상 없다는 거였지요. 만약 신이 방관자에 불과하다면 설사 그런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알고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중 한 명이구요. 그러므로 이제 우리 하느님은 고통받는 신이고 이 세계, 모든 살아있는 영혼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아직도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도 했으면 하는 질문입니다. 최소한 여러분 중의 일부는요. 지난 수 년 동안 예배 시간에 나오는 단어들 때문에 문득문득 불편했던 적이 많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마다 엄마들과 어린 아이들이 참가하는 예배시간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중 하나를 불렀습니다. ‘현명한 이는 바위 위에 집을 짓는다.’인데요, 아마 여러분도 아시는 곡이라 생각합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바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네. 홍수가 닥치면 모래 위의 집은 힘없이 무너지네.’ 같은 주에 장례식 예배도 있었는데, 거기선 잘 아시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네.’라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아주 영국적인 찬송가죠. 2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그 분에게 복종하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지진과 해일이 나고서는 저는 교회 안에서 다시는 이 노래를 못부를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첫 번째 질문은 ‘권능’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 우리 개개인을 위한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신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 틀림없나요? 매초 매순간이 그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나요? 바람과 파도가 그에게 복종하는 걸까요? 제 주위의 사람들은 가끔 우릴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신 은혜로운 신에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도록 말입니다. 덕분에 어려움은 극복되고 병은 낫고, 역경은 사라집니다. 또 주차장에서 쩔쩔매는 신도를 위해 딱 맞추어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하십니다. 저에게 얘기를 해주었던 신심으로 가득찬 반짝이는 눈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이 어떻게 믿음에 응답해주셨는지 찬양하는 얘기였죠. 하지만 정말로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이 세계의 흐름에 끼어들어 그걸 바꿀 능력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지진과 해일도 막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신은 사실은 토속 신인가요? 주차 공간은 찾아줄 수는 있지만 시속 500마일로 불어치는 폭풍은 막을 수 없는 신인가요? 이성을 가진 크리스챤이라면 이런 신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지진 해일에 책임이 있거나 혹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거나 이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비극이 있고 난 후 생존자들의 얘기가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파도타기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남자의 얘기도 있었고, 마침 학교에서 지진 해일에 공부한 덕분에 위험을 빨리 알아차린 십대 소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변가의 예배당을 떠나 언덕 위로 모였던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날 마침 특별 예배가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목사님의 강론은 그날따라 유난히 길었습니다. 덕분에 예배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해일이 닥쳤을 때 참사를 면할 수 있었죠. 그 일에 대해 누군가가 하느님이 보호하신 것이 틀림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음 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군요. 그것은 편파성에 관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정말 신을 믿거나 찬양하는 댓가로 그의 은혜를 얻습니까? 정말로 신은 중세의 군주와 같은 식으로 신민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건가요? 자신의 백성은 아무 일 없도록 보살피고 다른 이들을 다 죽게 내버려두는 건가요? 우리는 우주적인 편애, 제자식 감싸기를 보고 있는 건가요? 정말 그렇다면 저는 참담한 기분이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제가 신의 자식이라는 자격증을 반납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신은 인간의 최고 도덕 기준보다 열등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정말 신은 누구인가요? 거대한 세상 만물의 조종자, 혹은 한 부족의 수호신? 신이 이런 끔찍한 일을 허용하는 이유는 희생적 행동과 인류애을 끌어내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신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자비심과 믿음을요.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계획 속에 이런 참사가 처음부터 예정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따라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마도요.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전지전능한 신의 변형일 뿐입니다. 부품을 쓰고 버리듯 병사들을 소모하고 큰 전쟁에 내모는 우주의 총사령관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지진 해일을 일으키고 아우슈비츠를 허용하는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소설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순수하지만 신앙에 집착하는 그의 동생 말료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떤 진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수난의 일부라구? 그렇다면 나는 진리라는 것 자체가 그 만틈 값어지가 없다고 생각해. 우리가 단지 천국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많은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거야? 난 그런 신은 거부할 거야. 미안하지만 내 천국행 입장권은 정중하게 돌려주겠어.’

 

혹은 신은 태초에 이 우주를 만들기만 하고 그 후엔 운전대를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생물들은 진화의 법칙에 따랐겠지요. 이것은 좀더 그럴듯한 입장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신이 져야 할 도덕적인 최종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혹시 신은 감정 없는 구경꾼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우리를 사랑하되 힘이 없는 걸까요? 끝없는 동정심으로 우리를 굽어보지만 나쁜 일을 막거나 바꿀 힘은 없는 걸까요? 신은 이세계의 모든 고통에 무한히 참여하는 존재인가요? 우리의 고통을 그 자신안에 직접 받아들이고 느끼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이런 신을 받아들이려면 배후조종자로서의 신과는 완전히 작별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한 만물의 조종자라는 전통적인 관념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위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초기의 종교는 신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이집트인에게 재앙을 내리고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시를 무너뜨리고 화를 내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남긴 엄청난 결과물을 보고 신을 이해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이 행위자가 아니라면요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면 생명을 사랑하는 우주의 영혼이라면요? 만물에 내재하고 만물을 보살피며 아래로부터 떠받치고 키우는 존재라면 어떨까요?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면 어떨까요? 생명을 이루는 끝없는 관계와 연결들의 그물 속에 그가 존재한다면요? 삶과 죽음으로 연결되는 영혼의 순환 속에, 창조와 파괴의 필연성 속에, 진화의 과정 속에, 무한함과 장엄함 속에, 만물이 공유하는 거대한 의식 속에, 인류 전체의 영혼 속에, 당신과 나 속에, 마음과 몸과 영혼 속에, 해일과 그 희생자들 속에, 만물의 깊은 신비 속에, 실존과 부재, 단순함과 복잡함, 변화와 발달과 성장의 수레 바퀴 속에, 이런 내재성, 만물 속에 깃든 신의 속성은 어떻게 발현되는 걸까요?

 

대단히 알기 어렵고 어쩌면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 신은 우주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할까요? 독립된 어떤 존재로 부를 수는 없는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신에게 우리는 어느 정도 인성, 인격을 부여해야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엔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았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신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선언적 교리의 체계를 섬기는 것보다는 대우주의 근본적인 선함을 신뢰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이 무한하며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믿는다면서도 돌아서면 딱딱하게 굳어진 도그마의 틀에 집착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이런 신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섬겨야 할까요? 자신의 안에서 그 신을 찾음으로써 내면을 가꿈으로써 과학적 탐구와 마음 안에서 스쳐가는 감정과 생각과 집착들을 밀쳐놓은 다음에 남는 ‘나’속에서 깊은 성찰 속에서 그런 믿음 가진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런 신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다른 이들의 내면의 영혼과 친밀한 교감을 통해서 내 마음 속 깊은 무엇이 또 다른 이의 깊은 무엇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만약 신이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있다면 나와 당신의 만남에도 그 신이 함께 할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잘 아실 인도인의 인사말이 있습니다. “나마스테” 이렇게 허리를 굽혀 인사합니다. 번역하면 ‘내 안에 깃든 신이 당신 안에 깃든 신에게 인사합니다.’란 뜻입니다.

 

“나마스테” 이런 믿음은 어떻게 키워가야 하나요? 만물에 내재하는 무엇을 탐구함으로써 음악과 시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삶의 모든 평범한 속에서 하지만 그것들을 특별한 존재로 바꾸는 그안의 존재를 봄으로써, 이것은 끊임없은 깨어있음과 끈질긴 기다림, 사유하는 태도와 자비심, 그리고 자신의 것과 다른 것의 경험들에 대한 포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지진 해일 참사 직후 회중들 앞에 섰을때 사실 제겐 그들에게 줄 답이 없었습니다. 바이블 구절을 짚어가며 확인해줄 믿음의 보따리도 없었습니다. 제게 있는 건 의구심과 질문과 불확실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제안을, 그러니가 신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든 이어가기 위해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요.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은 “모르겠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고백이 아닐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