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반야심경

반야심경-1

서원365 2009. 1. 13. 19:04

경의 이름 :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원래 이릉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이를 줄여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하고, 또는 심경(心經)이라고도 한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 여기서 마하(mah)는 '크다' 또는 ‘많다’는 뜻이다.

 * 반야(般若) - 지혜라는 뜻, 진리에 부합하는 지혜이며, 결국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팔리어의 pa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 바라밀다(波羅蜜多) - pāramitā에서 온 것, 건너다. 저 언덕에 이른다. 한자로는 도피안(到彼岸)으로 해석한다. 번뇌와 망상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떠나 진리를 깨달은 자유와 행복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pāra가 ‘저 언덕’이고 mitā는 ‘건너다’의 뜻

 * 심(心) - 핵심, 진수(眞髓)의 뜻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

 * 경(經) -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은 진리가 담겨 있는 글을 경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말한다.


큰 지혜로 진리의 세계로 건너가는 핵심 되는 경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行深般若波羅蜜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님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에 오온이 모두 공임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고액을 건너셨다.

* 이 부분이 이 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다른 이름이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도 한다. Avalokiteshvara를 번역한 것으로 관세음이나 관자재는 번역으로 인한 차이이다. 관세음은 세상의 소리, 즉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Ava는 ‘지킨다’는 뜻이며, lokite는 ‘본다’는 뜻이고, shvara는 ‘자유롭다’는 뜻이므로 자유자재로 지켜본다는 뜻이다. 소리는 소리로써 표현한 것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소리도 포함하므로 관세음은 중생들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관자재라는 말은 중생들의 소리를 듣고 구제하는 것이 자유자재하다는 뜻이다. 관세음보살님은 극락 세계에서 대세지보살님과 더불어 아미타부처님을 옆에서 모시는 역할로 자주 등장하신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이런 글이 있다.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듣고 그들이 해탈을 얻게 한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큰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며, 물 속에 떠내려가더라도 곧 얕은 곳에 닿게 된다. 중생이 보물을 구하기 위해 큰 바다에 갔다가 큰 폭풍이 불어 그 배가 아귀인 나찰들의 나라에 떠내려가게 되었다고 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다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관음보살님이 세상에 출현하실 때는 관음보살님의 모습으로 출현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왕의 모습, 관리의 모습, 농부의 모습, 거지의 모습, 여인의 모습 등 가지가지 모습으로 출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이미 와 계실지도 모른다.


* 行深般若波羅蜜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

 행(行)은 실천을 뜻한다. 심(深)은 심오하다는 뜻이다. 반대는 천박함이다. 반야는 앞에서 나왔듯이 지혜를 말한다.

 도피안의 방법으로 6바라밀을 말한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이다. 여기에 보면 마지막에 있는 것이 반야바라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육바라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반야 즉 참다운 지혜를 얻게 되면 앞의 다섯 가지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 이르기 위해서는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육바라밀을 포함한다.

 보시(布施)란 베푸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과 능력을 베푸는 것을 보시라고 한다. 능력에는 육체적인 힘도 있지만 정신적인 힘도 있다. 그런데 참다운 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보시를 하고서도 보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보답을 바란다면 그것은 거래이지 보시가 아니다. 보답에는 물질적인 보답도 있지만 포상이나 칭찬, 자랑도 있다. 이러한 것이 없어야 진정한 보시가 된다. 이러한 마음을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마음이라고 한다. 나와 남이 하나라면 남에게 베풀어도 좋은 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보답이나 보상을 기대할 리가 없다. 진정으로 자타불이라면 ‘나’라는 생각도 ‘남’이라는 생각도 없다.

 지계(持戒)란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해도 되는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다섯 가지 계율을 말한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망어(不妄語), 불사음(不邪淫), 불음주(不飮酒)이다. 생명체를 죽이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헛말을 하지 말고, 음란한 짓을 하지 말며, 술을 먹지 않는다. 이를 한 마디로 하면 자기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으며 남을 불쾌하게 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외에도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지계이다.  보시가 적극적인 행위라면 지계는 소극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욕(忍辱)이란 욕됨을 참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불쾌하게 하거나 피해를 주거나 모욕을 주어도 참는 것을 인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참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노나 짜증을 내어 감정을 표출하여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되돌아오기 쉬워서 좋지 못한 일이 점점 커지게 된다. 수행자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다. 큰 피해를 주거나 생명을 없애야 꼭 원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심적, 물적, 육체적으로 피해를 주어서 분노를 불러일으키면 바로 원수가 된다. 그랬을 때 분노와 짜증을 참는 것을 인욕이라고 한다.

 분노를 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처음부터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용서하는 사람도 용서 받는 사람도 없게 된다.

 ≪금강경≫ <離相寂滅分>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리고 할 때에도 아상이 없고 인상이 없고 중생상이 없고 수자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옛날 마디마디 잘리고 갈라질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당연히 성내고 한스러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진(精進)은 노력함이다. 불교에서 궁극적 목표는 성불에 있으므로 성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정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돈을 조금 더 벌고, 지위를 더 높이고, 인기를 얻는 등 사소한 것을 위한 노력을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알고 모면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 어!”하는 동안에 한 생이 속절없이 끝나버린다.

 선정(禪定)은 마음을 안정시켜 나와 모든 것을 살펴보고 그런 가운데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분별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반야(般若)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이 반야이다. 모든 것이 공함을 바로 아는 것이다.

 


심오한 지혜 바라밀을 실행할 때에, 또는 심오한 지혜로 비추어보니


*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

 오온(五蘊)에서 온(蘊)은 쌓는다는 뜻이다. 다섯 가지 온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르다. 오온을 모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맥상 오온을 모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색온(色蘊) -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 감각이란 보통 사람의 경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참고로 어떤 사람은 색온을 육체라고 하기도 한다. 또 빛깔과 모양이 있는 것을 색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색온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아래에 나오는 수상행식의 해석도 달라진다.

 수온(受蘊) - 감각에 의해 받아들이는 작용이다. 이를 감수 작용이라고 한다.

 상온(想蘊) - 감수 작용에 의해 저장된 것을 떠올리는 것. 표상 작용이라고 한다.

 행온(行蘊) - 행동과 의지의 작용이다. 욕구나 의지가 여기에 해당되며 행온의 결과가 업으로 쌓이게 된다.

 식온(識蘊) - 의식 작용, 추리, 판단 등으로 이성(理性)적 활동에 따른 작용이다.


 그러면 공(空)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이 경이 설하려고 하는 주제이다.

 공은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에 대한 규정은 본질이 아니다. 앞의 두 가지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라고 한다.

 불교에 말하는 진리는 연기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줄인 말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이를 발현시켜주는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일의 씨앗을 인(因)이라고 한다면 이를 싹트게 하는 빛과 물과 공기 등은 연(緣)이 된다. 그리고 과일 나무는 그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연기가 씨앗과 나무라는 간단한 구조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 발아, 성장, 거목 등으로 이어져있고, 또 다시 씨앗과 발아만 떼어 놓고 보더라도 그 안에는 셀 수 없는 연기가 들어 있다. 이러한 연기법에 따라 모든 것은 변화한다. 잠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이다’라고 말하자마자 이미 이것이 아니다. 예컨대 2008년의 나와 2009년의 나는 이미 같지 않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하였다. 끊임없는 신진대사, 세포교체, 생각의 변화 등으로 결코 같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나의 실체인가? ‘지금의 나’라고 말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의 나’가 되어버린다. 나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알고 보니 나라고 하는 것의 실체는 없다. 즉 공(空)이다.

 이러한 연기는 시간적으로도 그렇지만 동일 시간 내의 공간에서도 역시 그렇다. 씨앗은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조직들로 되어 있다. 그 조직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짐으로써 씨앗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조직 역시 수많은 세포들의 연관성 속에 있으며, 세포 역시 수많은 더 작은 요소들의 연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다시 분자들의 연관성으로, 분자들은 다시 원자들의 연관성으로, 원자는 다시 핵과 전자의 연관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연관성이 깨지면 더 이상 물질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핵과 전자는 마지막 기본 실체인가? 현대 과학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고 있다. 이렇게 가다보면 과연 실체는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교는 분명하게 변치 않는 실체는 없다고 말한다. 이를 공(空)이라고 한다.

 실상이 이럴진대 인간이 규정하는 상대의 세계는 더욱 말할 나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고 규정한다. 시비, 선악, 호오(好惡), 정사(正邪) 등의 가치 판단 뿐만 아니라, 고저장단, 동서남북, 원근 등 참으로 다양한 규정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이 정말로 맞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와 다른 판단을 내린 사람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판단과 규정이 정말로 맞는 것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대적 연관성 속의 관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도화상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아도화상이 제자들 앞에서 주장자를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주장자에 손이나 다른 도구로 건드리지 말고 짧게 만들어 보라.”

제자들은 당연히 당황했다. 어떻게 손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주장자를 짧게 만들 수 있겠는가?  아무도 해결을 못했을 것은 뻔하다. 어떻게 하면 될까? 알고 보면 방법은 간단하다. 사실 주장자를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단지 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주장자에는 짧음이라는 것도 없고 길다고 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모두 보는 사람의 기준이 만들어낸 것이다.

 아도화상은 주장자 옆에 주장자보다 긴 막대기를 나란히 놓았다. 주장자는 긴 막대기보다 당연히 짧다.


그런데 공이 이런 것이라고 말해버리면 이미 고정된 공(空)의 모습이 된다. 그것은 공이 아니다. 그래서 ≪유마경≫]에 보면 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유마거사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모든 것이 모두 공함을 밝은 지혜로 비추어 보고

 


*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 모든 고뇌를 넘어섰다.

 사람은 수도 없는 번뇌를 짊어지고 산다. 생로병사에 따른 번뇌뿐만 아니라, 생각 생각마다 근심과 불안과 공포가 들어 있다. 그래서 108번뇌라고 하기도 하고 84000번뇌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체의 번뇌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번뇌랄 것이 있어 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공함을 환히 비추어 보니 번뇌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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