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반야심경

반야심경-3

서원365 2009. 1. 13. 21:08

無無明(무무명) 亦無無明盡(역무무명진)

乃至(내지) 無老死(무노사) 亦無老死盡(역무노사진)

무명이 없으며 무명이 다함도 없고

내지 늙고 죽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    

 


* 무명에서부터 노사까지를 부정한 것으로 12연기(緣起)의 각 요소들이 실체가 없음을 설한 것이다.

 12연기는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무명이란 어리석음을 말한다. 무명으로 인하여 행부터 노사까지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며, 번뇌가 이에 따라 일어난다. 그러므로 무명을 지(智)가 대신하게 되면 그 나머지도 일어나지 않는다.

 법륜 스님의 해설을 좇아가본다.

 무명은 어리석음이요, 그래서 삶을 어리석음과 충동에 내맡기게 된다. 이로 인해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게 되니 이를 행(行)이라고 한다. 행은 업을 쌓고 잘못된 마음자리를 만드는데 이를 식(識)이라고 한다. 식은 현재의 업장, 잘못된 분별과 의식을 말한다.

 명색(名色)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대상이다. 즉 육경(六境)이다. 명색이 육입(육근)을 만나는 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이때 감수 작용이 일어나고 갈애와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애와 취 뒤에 새로운 업이 추가되는 것을 유(有)라고 한다. 그래서 생과 노사(老死)가 되풀이 된다.


 대단히 체계적으로 고(苦)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쫓아 괴로움의 원인을 찾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지혜의 불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반야라고 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무명부터 노사까지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12연기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12연기를 통해 12단계를 설명하니 잘못 무명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없애야 할 무엇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중생에게 무명이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불이 꺼져 있어서 어두울 뿐 지혜의 불이 켜지면 어둡던 방이 바로 환해진다. 그러니 무명도 없거니와 무명을 없앰도 없는 것이다.

 ≪금강경≫<非說所說分>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마라.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마라.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설할 법이 없다는 것이며 이름이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12연기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지만, 만약 그것에 너무 얽매여 그 하나하나를 실체로 본다면 이는 부처님께서 설하시고 한 뜻을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어리석음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니 어리석음을 없앰도 없다. 그러니 늙고 죽음이란 실체 또한 없고 늙고 죽음을 없앰도 없다.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  無智亦無得(무지역무득) 以無所得故(이무소득고)

고집멸도가 없으며, 지(智)도 없고 얻음도 없으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

고집멸도(無苦集滅道)는 사제(諦)이다. 즉 네 가지 진리로써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한 진리이다. 이것은 고(苦)이다. 이것은 고의 원인이다. 이것은 고를 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를 멸하는 길이다. 이 네 가지를 사제라고 한다.

 인생의 모습을 고(苦)라고 본다. 중생들은 수많은 고통과 번뇌에 싸여 살아가고 있다. 이를 고제(諦)라고 한다.

 이러한 고에는 원인이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이를 집제(集諦)라고 한다.

 따라서 고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애면 자연히 고(苦)도 사라진다. 이를 멸제(諦)라고 한다.

 그런데 고의 원인을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없애는 바른 길이 있다. 도제(道諦)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있다.[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고․집․멸․도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苦)라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번뇌는 사실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기가 만든 기준, 기대 심리, 막연한 생각, 어리석음, 분노로 인한 잘못된 판단 등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중학교에서 현재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자주 선배나 동년배 중에는 필요 없는 울분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사람을 본다. 그 중 한 선배는 거의 심한 우울증 상태까지 간 적이 있었다. 원인은 이렇다. 그 분은 자기 자신이 교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단과 관련 있는 다른 분이 교감이 되었다. 그 분은 늘 자기가 교감이 되어야 하는데 안 된 것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쪽 구석에 앉아 사람들과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우울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은 아무도 그 분이 교감이 되어야 한다고 약속한 일은 없다. 단지 나이로 볼 때, 그리고 자기가 교무부장을 지냈기 때문에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인가? 그 분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분노하고 우울해 한 것이다. 따라서 그 분이 가진 고(苦)는 그 분이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만 버리면 바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요즘은 평균 70대 후반의 나이를 살다가 간다. 따라서 50살에 죽은 사람은 평균에 비교해봐서는 일찍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평균 연령은 계속 변하는 것이며,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이 없다면 50살을 살았다고 해서 조금 산 것이 아니며,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다. 100살을 살았다고 해서 오래 산 것도 아니다. 더구나 나이가 인생을 값지게 살았다거나 아니라거나 할 기준이 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그러니 몇 살을 살았건 원통해하거나 기뻐할 일이 아니다.

 

고라는 실체는 없으며 집과 멸과 도라는 실체도 없다.


* 無智亦無得(무지역무득) 以無所得故(이무소득고)

 지(智)는 깨달음이라고 해석한다. 깨달았다고 할 것이 없으며 얻을 무엇이 없다.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체험이나 지식을 더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고정된 것이 없으며, 나도 없고 남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가 임의로 만든 판단 기준이야말로 진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금강경≫<無得無說分>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를 얻었는가? 부처님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는가?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한 바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할만한 일정한 법이 없으며, 또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만한 일정한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 모두 취할 수 없는 것이며 설할 수도 없는 것이며, 법도 아니고 법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불 꺼진 방에 불이 켜는 것과 같다. 어둔 방에 불이 켜진다고 해서 새로 그 방 안에 다른 물건이 더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불 꺼진 방이나 불 켜진 방이나 동일하다. 그러면 깨달은 상태나 그렇지 않은 상태나 같은가? 시각에 의존하는 사람에게는 불 꺼진 방과 불 켜진 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같으면서도 엄청나게 다르다.


 깨달음도 없으며 얻음도 없으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菩提薩埵(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碍(심무가애)

無罣碍故(무가애고) 無有恐怖(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구경열반)

보리살타가 반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과 막힘이 없으며

걸림과 막힘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와 몽상을 멀리 멀리 떠나며 구경 열반에 이른다.


* 菩提薩埵(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罣碍(심무가애) 無罣碍故(무가애고) 無有恐怖(무유공포)

 보리살타는 줄여서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원어는 Bodhi-sattva로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罣)는 괘로 많이 읽는 글자이다. 걸린다는 뜻이다. 그물을 말한다. 애(碍)는 막힌다는 뜻이다. 장애물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걸리거나 얽매임이 없다는 뜻으로 거리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자유자재하다 평안하다 번뇌가 없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무유공포는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공포란 불안이나 걱정을 모두 포함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의지하므로 마음에 거리낌이나 얽매임이 없으며 공포나 불안이나 걱정이 없다.


*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구경열반)

 전도는 앞뒤나 본말(本末)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전도된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이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내적으로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 가정이 돈을 벌고 아끼는 것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가정들이 돈 때문에 다투다가 결국 이혼까지 하고 가정의 화목은 깨진다. 이 경우는 돈이라는 가치와 화목이라는 가치를 전도시킨 경우이다.

 5월이 되면 안타까운 뉴스를 들을 때가 많다. 중간 고사를 친 학생이 낮은 성적을 비관해 자살하는 경우이다. 대개 신학년을 맞으면 모든 학생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의욕적인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동안 소홀했던 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한다. 그런데 성적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쳐 보니 여전히 형편없다. 그래서 그만 이를 비관해 목숨을 끊는다. 물론 이렇게 되는 데는 부모들의 다그침도 한몫을 한다. 왜 성적이 중요한가? 그 아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즉 성적이 그 아이를 위해 있는 것이지, 그 아이가 성적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성적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반야의 지혜로써 모든 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전도된 생각이 없다.

 몽상이라는 꿈같은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지혜롭지 못한 생각, 비합리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편견이나 선입견도 몽상의 일종이다. 비현실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생각도 몽상이다.  

 ≪誡初心學人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如人夜行(여인야행) 罪人執炬當路(죄인집거당로)

 若以人惡故(약이인악고) 不受光明(불수광명) 墮坑落塹去矣(타갱락참거의)

 어떤 사람이 밤에 길을 가는데, 죄인이 횃불을 잡고 길을 맡았다고 하자.

 만약 횃불 잡은 사람이 악인이라고 해서 그 빛을 거부한다면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참호에 빠진다.


 횃불은 악인이 들고 있든 선인이 들고 있든 횃불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가 길을 밝히는 것을 담당했다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횃불을 들고 있는가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똑 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상대가 하면 나쁜 일이 되고, 내가 하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생들의 생각이다. 어찌 꿈같고 허무맹랑한 일이 아닌가?

 특히 자기도 모르게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 바로 몽상이다. 몽상의 반대는 여실히 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하다고 관하는 것을 원리전도몽상 이라고 한다.

 보살은 반야의 지혜로 모든 것을 비추어 밝게 보기 때문에 몽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음에 걸리거나 얽매임이 없고 공포가 없어서 절대 자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여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


三世諸佛(삼세제불) 依般若波羅蜜多(의반야바라밀다)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삼세는 과거, 현제, 미래를 말한다. 불교의 시간관은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무한하다는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 사이에 세계는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붕괴되며 빈 상태로 돌아가는 활동을 되풀이 한다. 그 사이에 수많은 부처님이 계셨고, 앞으로의 세계에도 한없는 부처님들이 계실 것이다. 이 모든 부처님을 삼세제불이라고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arasamyaksambodhi)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풀이한다.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


故知(고지) 般若波羅蜜多(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시대신주) 是大明呪(시대명주) 是無上呪(시무상주)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 眞實不虛(진실불허)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요, 대명주요, 무상주요, 무등등주로서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며, 참되고 헛됨이 없음을.

* 주(呪)는 만트라(mantra)를 번역한 것으로 만다라(曼茶羅)라고 하며, 진언(眞言) 또는 다라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진언이란 참된 말이라는 뜻이다. 다라니는 총지(摠持)라고 번역하는데 경전의 알맹이만을 뽑고 뽑아 하나로 뭉친 것으로 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홍정식 역해, ≪반야심경 금강경 선어록≫)

 대신주는 신묘하여 불가사의 하다는 뜻이며, 대명주는 가장 밝다는 뜻이다. 무상주는 가장 높다는 뜻이며, 무등등주는 같은 것이 없을 정도로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주는 이것이 가장 신묘하고 불가사의하며, 가장 밝고, 가장 높으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서, 모든 괴로움을 없애준다는 것을, 그리고 참되고 헛됨이 없다는 것을.

 


故說般若波羅蜜多呪(고설반야바라밀다주) 卽說呪曰(즉설주왈)

擖諦擖諦(아제아제) 波羅擖諦(바라아제) 波羅僧擖諦(바라승아제) 菩提薩婆訶(모지사바하)


 * 발음이 한자음과 많이 다르다. 擖을 깎을 갈, 諦는 체념할 체, 菩는 보리 보, 薩은 보살 살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과 관계가 없다. 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음은 갓데갓데(gategate) 파라갓데(paragate) 파라삼갓데(parasamgate) 보디스바하(bodhisvaha)이다.

 우리 말로 옮기면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에 가서. 깨달음을 성취하여지이다.” 여기서 승(sam)은 과거 완성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저 언덕과 이 언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보면 여기가 저 언덕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니, 즉 그것을 말하면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으로 가서 깨달음을 성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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