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반야심경

반야심경-2

서원365 2009. 1. 13. 20:52

舍利子(사리자)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受想行識(수상행식) 亦復如是(역부여시)

사리자야,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수, 상, 행, 식도 역시 이와 같다.

 


* 舍利子(사리자) - ≪반야심경≫은 관음보살님과 여기 나오는 사리자의 대화로 되어 있다. 설명하는 사람은 관음보살님이고 듣는 이는 사리자이지만, 실제로는 이 두 분의 대화를 대중들이 듣고 있다. 대부분의 불경이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사리불(舍利弗 Śāriputra)을 말한다. 지혜가 가장 뛰어난 제자라고 한다. 이 경전이 반야바라밀을 설하므로 사리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사리자는 목건련과 더불어 부처님의 제자 중 장로였으며,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백 명이 넘는 제자를 거느려, 일가를 이룬 사상가였다고 한다.

 나중에 사리불과 목건련 모두 부처님보다 먼저 입적하여 결국 제자들의 우두머리는 마하가섭존자가 된다.


*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그런데 위와 같이 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공이 일체의 사물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의 본질이 공이다. 그런데 고정된 본질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색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관(感官)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그 본질은 공(空)이다. 그러므로 공과 색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공을 떠나 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이 곧 색이며, 색이 곧 공이다.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있지 않으며 공을 떠나 색이 따로 있지 않다. 즉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다.


* 受想行識(수상행식) 亦復如是(역부여시) - 수상행식도 또한 역시 이와 같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즉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이다. 상과 행과 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요약하며 말하면 일체를 떠나 공이 따로 있지 않으며 공을 떠나 일체가 따로 있지 않다. 일체가 곧 공이요 공이 곧 일체이다.


舍利子(사리자) 是諸法空相(시제법공상)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減(부증불감)

사리자야 이 모든 존재의 공상은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더러움도 않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 是諸法空相(시제법공상)

 제법(諸法)이란 모든 것을 말한다. 법(法)이라는 글자를 불경에서는 다양하게 사용한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의미는 진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법은 유무형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공상(空相)은 공한 모습이다. 그러데 앞에서 말했듯이 공한 모습이라는 고정된 모습이 있으면 이미 공(空)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이 모든 것의 공함은


* 不生不滅(불생불멸)

 생겨남(生)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왜 그럴까?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생멸을 끝없이 보고 있다. 주변에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누가 죽는 것을 수시로 보고 듣는다.  며칠 전에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지 않고 두었더니 상했다. 내버려두면 썩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끝없이 생멸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부분적으로 볼 때 그렇다. 전체적으로 시야를 넓혀 보면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음을 보게 된다. 인생을 보면 부모로부터 태어나 겨우 길어야 백 살 정도를 살다가 죽는다. 생과 사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좀 더 눈을 크게 뜨면 죽음이 결국 또 다른 생의 시작이다. 내생(來生)에서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뿐이다. 생겨남은 결국 그 전의 삶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를 현생에서만 보면 생사가 있지만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이어서 보면 생사는 없다.

 음식물이 썩어 결국 사라지는 것이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분해되어 다른 연관성을 가지고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뿐이다. 일부는 액체나 기체로 변하고 또 일부는 미생물의 먹이가 되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간적으로 확장시켜 보면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 不垢不淨(불구부정)

 구(垢)는 더럽다는 뜻이다. 정(淨)은 깨끗하다는 것이다. 두 개는 상대적 개념이다. 인위적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제법(諸法) 자체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시궁창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곳이다. 그러나 지렁이에게는 깨끗한 안식처가 된다. 방안은 사람에게는 깨끗한 거주 공간이지만, 지렁이에게는 죽음의 장소가 된다.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종이 상자들은 청소부에게는 참 괴로운 일거리이지만, 넝마들에게는 소중한 수입원이 된다. 구정(垢淨)뿐만 아니라, 인간이 내리는 대부분의 상대적 판단들이 실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며, 제법 자체에는 그러한 성질이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자기가 만든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가르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인 양 쉽게 생각해버린다. 그 기준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가족 간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 기준에 바탕을 주고 누구를 좋아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싸움까지 한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번민에 빠지게 된다.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등 인간의 상대적 판단은 제법의 본질이 아니다.


* 不增不減(부증불감)

 흔히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는 것을 비유할 때 바닷물을 예로 든다. 때로는 엄청난 파도도 치고, 너울도 만들며, 얼어서 얼음이 되기도 하고, 빙하가 녹아 물이 되기도 한다. 끊임없이 증발하는가 하면 육지 곳곳에서 계속해서 강물이 흘러든다. 그러나 바닷물은 줄거나 늘지 않는다. 단지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을 뿐이다. 위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시간적인 측면에서 본 것이라면, 부증불감(不增不減)은 공간적 차원에서 본 것이다. 부분만 보면 줄어드는 것도 있고 늘어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서 보면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우주 전체로 본다면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과학에서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형태의 변화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우주관은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다는 우주관이다. 그 변화를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표현한다. 성은 이루어짐이요, 주는 머무름이며, 괴는 무너짐이요, 공은 텅 빔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주괴공은 끝없이 되풀이 된다고 본다. 여기서 공은 에너지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에너지가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수많은 물질들은 만들어내는데 과학에서는 이를 대폭발(Big Bang)이라고 한다. 그리고 급격히 팽창하면서 새로운 우주가 전개되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서로의 인력이 서로를 잡아당겨 움츠려 들다가 형태마저 무너져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생겨난 것은 아니다. 모습이 바뀔 뿐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란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별것 아닌 변화에 웃고 우는 것이 아닌가?


공간적으로 확장시켜 보면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 형태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是故空中(시고공중) 無色(무색)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런 까닭에 공에는 색이 없으며 수상행식도 없다.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며 색성향미촉법이 없다.

안계가 없으며 내지 의식계도 없다.


 * 일체가 공하고 실체가 없으므로 이런 설명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색수상행식은 앞에서 말한 바 오온(五蘊)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일체 또는 제법이 된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는 무안식계, 무이식계, 무비식계, 무설식계, 무의식계의 준말이다.

 오온을 다시 감관과 감관의 대상과 감관 작용으로 세분한다.

 감관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이다. 이를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육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육경(六境)이라 하며,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 있다. 여기서 법(法)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을 말하다. 개념, 이념, 성격, 법칙 등이다. 육근이 육경을 인식하는 활동을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다. 안식은 시각 작용이며, 이식은 청각 작용이다. 차례대로 후각 작용, 미각 작용, 촉각 작용, 의식 작용을 말하는데, 보통 사람의 경우를 말하며 특별한 사람은 다른 인식 작용이 있을 수 있다. 텔레파시를 느끼는 것, 미래에 대한 예지 능력, 공간을 초월하여 인식하는 능력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 대상이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공(空)할 뿐만 아니라 육근 역시 변화무상하며, 따라서 인식 작용 역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것이 아니다. 시각(視覺)을 예로 들어보자. 시각은 사물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을 보고 인식하는 작용이다. 그러면 동일한 사물을 동시에 보았을 경우 똑 같은 사물로 인식할까? 색맹인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눈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좀 더 진하게 느끼기도 하고, 더 희미하게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색을 더 강하게 느끼기도 한다. 또 난시인 사람은 굴절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성향미촉법 역시 이와 같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있는 눈 역시 세월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대상도 변하고 대상을 보는 눈도 변한다. 시각 작용 역시 당연히 변한다.

 육경과 육근과 육식을 십팔계(十八界)라고 한다. 그런데 십팔계라고 하니까 고정된 실체로서의 십팔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눈과 시각의 대상과 시각 작용이 변하여 실체가 없듯이 이 역시 실체가 없다.


오온뿐만 아니라 육경과 육근과 육식 등 십팔계 모두 실체가 없으며 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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