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절과 교육■/일반자료

퇴계 이황 선생

서원365 2009. 3. 23. 18:52

퇴계 선생과 증손자 


 많은 사람들이 퇴계 선생을 존경하고, 또 그 분의 사상을 연구하며, 나아가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알게 해주는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퇴계 이황이 증손자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맏손자 안도(安道)는 성균관 유학 생활 중에 아들 창양을 얻었으며, 퇴계는 그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좋아했다. 퇴계는 장손이 첫 자식으로 아들을 얻은 기쁨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집안에 이보다 더 큰 경사는 없다."

 그런데 호사다마(좋은 일에 좋지 못한 일이 자주 생긴다는 뜻)라고, 창양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기엄마가 다시 임신하는 바람에 젖이 끊기는 사고가 발생했다. 요즘처럼 분유가 있다면 별일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시대인지라 매우 큰일임에 분명했다.

 집안에는 이런저런 조치로 모유를 대신했으나 효과가 없어서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고 영양실조로 인해 별별 병을 다 앓았다. 그래서 손자 며느리는 도산 본댁에 유모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본댁에는 마침 딸을 낳은 여자 종이 있기에 그 아기를 떼어놓고 서울로 보내기로 했으며 다만 이 일을 퇴계 몰래 추진했다. 증손자가 태어났을때 퇴계가 무척이나 기뻐했으므로 나중에 알려도 암묵적으로 이해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가 그 일을 알아채고는 즉시 중단시키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몇 달만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더 자랄 때까지 기다려라.'

 별 수 없이 증손자 창양은 밥물로 배고픔을 달래야 했고 겨울과 봄을 어렵게 넘겼으나 결국 1570년 5월에 죽고 말았다. 퇴계 선생은 그 아픈 마음을 여러 문인들에게 토로 했으나.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은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그건 바로 인간평등사상이었다. 퇴계 선생은 신분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인간을 모두 동등한 인격체로 여겼고 그 사상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퇴계 선생과 배순 


 퇴계 선생은 1548년 10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였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청탁을 일체 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당시 소수서원에서 가까운 배점리에 배순이라는 대장장이가 살았다. 배순은 비록 자신이 천민이었지만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자주 퇴계 선생이 강의할 때면 뜰에서 강의를 들곤 하였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퇴계 선생은 불러들여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가르쳤다.

 나중에 퇴계 선생이 풍기를 떠나자 배순은 쇠로써 퇴계 선생 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복을 입었으며, 철상(鐵像)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시대를 앞선 평등 의식

 

 “지난 해(2003년) 12월 나는 중국 영파에서 열린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일본 규슈 지역에서 참석한 원로 학자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퇴계 연구를 오래도록 해오고 있는데, 퇴계의 인격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솔직히 나는 중국의 공자보다도 퇴계가 더 인간적이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위의 퇴계와 증손자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공자의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공자가 조정에서 돌아와서 사람이 상했느냐를 묻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퇴계의 경우라면 말이 죽었는지 어떤지도 친절하게 물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혔다.”


 영남대 최재목 교수의 ≪쉽게 읽는 성학십도≫를 김호태의 ≪퇴계 혁명≫에 인용한 글

 

 퇴계 선생과 권철 


 퇴계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도산서당에서 제자를 양성할 때 일찍이 영의정을 지낸바 있는 권철(權澈)이 퇴계를 만나러 서울에서 안동 도산서당을 찾아 내려왔다.

 권철 일행이 도산서당에 도착하자 퇴계는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권철을 융숭히 영접하였다.

 그리하여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식사 시간이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보리밥에 반찬은 콩나물국과 가지 잎 무침과 산채뿐으로 귀한 손님 대접이라고는 특별히 북어 무친 것 하나뿐이다.

 평소 산해진미만 먹든 권철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끼니마다 그러니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예정을 앞당겨 떠나게 되었다. 권철이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하니 퇴계는

 “촌부가 대감 전에 무슨 여쭐 말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느낀 점을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성한 식사대접을 못해드려서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 전에 올린 식사는 일반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더 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습니다. 농부들이 먹는 음식은 꽁보리밥에 된장찌개 하나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됩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는 백성과 함께 즐김에 있는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정치에 진심으로 복종하겠나이까? 대감께서는 그 점에 각별히 유의 하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명종의 각별한 대우


 1545년 7월에 인종(仁宗)이 갑자기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였다. 명종은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 퇴계가 그의 사부(師傅)를 맡은 일이 있어 즉위하자마자 퇴계를 조정에 중용하려고 여러 차례 관직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퇴계는 원래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그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관직을 사양해 오다가 마침내 1565년 12월에 명종으로부터 특별 부름을 받았다.


 왕이 보낸 전교(傳敎)에는 “과인이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분을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음과 병을 칭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안다면 조속히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퇴계는 명종의 각별한 소명을 거역할 수 없어 1566년 66세(명종 21년) 정월 상경 길에 올랐으나 병환은 가볍지 않았다. 겨우 영주에 도착해서 사직소를 올리고 풍기에 가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유지와 함께 행로의 각 수령에게는 노신을 잘 호송하라는 영을 내렸다. 왕의 유지(諭旨)는 “경이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과인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하지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 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명종은 내의에게 일러 약을 조제해 가지고 가서 문병하라고까지 명하였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아뢰고, 눈 쌓인 죽령을 피해 조령으로 방향을 바꾸어 예천에 이른 후 또 다시 부디 병든 몸을 놓아달라고 간절히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국왕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퇴계에게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퇴계는 이번에도 사직소를 올려 나아가지 아니하고 절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왕은 윤허는 커녕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에다가 경연관 춘추관 동지사까지 겸임시켜 상경하도록 독촉하였다.


 그러다가 4월이 되어 올린 퇴계의 장계를 조정대신들이 보고, 국왕에게 6경(六卿)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윤허를 주청하여 중추부 지사로 체직하게 되었다. 7월에 가서 퇴계는 자헌대부와 중추직도 해직하여 달라는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치 아니하고 병이 낫는 대로 상경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도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하여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어진이를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유신(儒臣)과 조정 화공(畵工)을 도산에 내려 보내 퇴계가 살고 있는 ‘도산도(陶山圖)’를 그려오게 하여 그림 위에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하여 늘 곁에 두고 보면서 퇴계를 그리워 하였다.

(출처: 권오봉저, ‘이퇴계의 실행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