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책이야기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서원365 2007. 10. 6. 17:04

* 이 책은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설서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덕경을 방편으로 이용하여 저자의 마음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저자 : 김기태

1961년 출생

대구계명대학교 법대 1년 중퇴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윤리교사, 신문사 교열부 기자 역임

참고 : 김기태의 경전 다시 읽기(http://www.be1.co.kr)

출판사 : 침묵의 향기

출판일 : 2007년 4월


1. 『道德經』을 다시 읽는다. - 평화 실현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이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도덕경』을 다시 읽어본다.

 공자는 “만약 아침에 道를 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노자의 『道德經』은 책이름부터가 道라는 말로 되어 있거니와 그의 책 내용 역시 道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道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주의 질서를 말하며, 동시에 평화 실현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천지 자연과 인간을 관통하는 원리로서의 道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道를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살던 춘추시대가 대혼란에 빠졌다고 보고, 따라서 질서를 바로잡고 평화를 되찾는 방법은 이 道가 무엇인가를 알아 道에 맞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공자는 무엇을 道라고 생각했을까? 공자가 道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仁과 禮였다. 仁과 禮를 잃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仁과 禮는 무엇인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이기심을 줄이고 남을 배려하거나 나아가 사랑하는 것이다. 仁과 禮를 잃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자는 仁과 禮에 바탕을 두고 각자가 자기 분수를 벗어남이 없이 생활하는 것이야말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君은 君답고 臣은 臣다우며 父는 父답고 子는 子다울 때 비로소 평화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이러한 그의 뜻을 펴기 위해 많은 제후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이룩하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초기 봉건 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초기 봉건 사회와 그가 살던 사회는 아주 다른 사회라는 점이다. 초기 봉건 사회는 종법에 바탕을 둔 사회였다. 맏아들이 왕이 되고 그 형제들과 공신들은 제후가 되었다, 왕과 제후간의 핏줄이 멀지 않으므로 형제의 의리가 지켜졌고, 함께 나라를 세운 군주와 신하 간에도 의리가 지켜졌다. 그러나 세습을 거듭하는 동안에 핏줄은 이미 남남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초기의 왕과 제후 간의 의리도 그 자손들 사이에서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꿈꾸었던 사회는 사실은 회복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즉 이제 당시 사회는 초기 사회로의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가 본 혼란의 원인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 사회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평화는 이룩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도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은 참된 도(常道)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름 하는 것 역시 참된 이름(常名)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常道(상도)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천지와 인간을 관통하는 원리를 말한다. 常名이란 이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이것이 道다 저것이 道다 라고 하지만, 진리로서의 도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러한 주장들이 세상을 더욱 그르치게 할 뿐이라고 한다. 개별자들에게 붙여진 이름 역시 개별자의 그 자체의 본질을 나타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가에서 말하는 正名論을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다. 군이니 제후니 사대부니 하는 것들이 모두 일시적인 제도 하에 생겨난 지위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常名(상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름 없음은 뭉뚱그려 천지가 되지만(無名天地之始) 이름을 붙임으로써 개별적인  만물이 되는 것이다(有名萬物之母). 그러므로 인위적인 조작이 없다면 현묘한 도를 보게 되지만(常無欲以觀其妙) 인위적인 욕심을 내게 되면 본질을 볼 수 없는 것이다.(常有欲以觀其徼)”

 

 有欲은 인위적인 노력을 말한다. 위의 道可道나 名可名이다. 그리 되면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원리를 볼 수 없다. 즉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없고 경계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전체로서의 天地나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萬物은 같은 것이지만 보는 각도가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평화 실현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위적인 노력을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현인을 숭상하는 것, 지식을 쌓는 것, 통치하려는 것 등, 이 모두가 道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이상 사회로 생각했던 사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小國寡民(소국과민)- 습백의 그릇이 있으나 쓰지 못하게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기지 못하게 한다. 배와 수레가 있으나 타는 바 없고, 비록 무장한 군사가 있으나 벌여 놓은 일이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노끈을 다시 맺어 쓰게 하고, 밥을 달게 여기게 만들며, 그 옷을 좋게 여기게 하며,그 거처에 편안하게 하고, 그 풍속을 즐기게 한다. 이웃 나라는 서로 마주 보며 닭 울고 개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백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자가 초기 봉건 사회를 회복하려는 시도보다도 더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小國寡民의 사회는 다름 아닌 씨족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사회가 돼버렸는데 억지로 그런 사회로 돌아가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小國寡民 조차도 그의 말대로 하면 이미 원시 자연 사회로부터 한참을 진행하여 온 사회이다. 즉 그가 말하는 道에 합당한 사회는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道可道不常道’가 아니고 무엇인가?


2.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자연인가?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천지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먼저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면 자연의 도에 따라야 하니 마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인간과 자연은 다르므로 인간은 인간의 道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면 당연히 인간은 자연의 道(天地之道)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자연의 도를 거슬리는 것은 재앙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의 道 아닌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道에 벗어나면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道 아닌 다른 원리가 우주에 존재함을 의미하여 스스로 모순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도 자연 현상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道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위의 세계도 역시 道의 顯現(현현)일 뿐이며, 제자백가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사회의 혼란상도 역시 道의 한 모습일 뿐이다. 초기 봉건 사회나 小國寡民의 모습이나 다 道의 현현일 뿐이다.

 

 天地之道는 非天地之道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 전체가 망해버리는 것도 道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우주가 함몰되어도 역시 道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모두 道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노자가 말했듯이 천지는 不仁하다.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이지, 인간에게 특별히 어질고, 특정 생명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특정 생물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대홍수가 나서 뭇 생명들을 휩쓸어 버릴 때 가려서 쓸어버리는 것은 없다. 쓰나미가 해안을 덮칠 ,때도 역시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인이나, 특정 생물을 가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무엇이 대자연의 道인가 하는 질문은 사실은 별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이 세상에 道 아닌 것이 없다는 응답도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道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위적 노력도 그냥 道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道인 것을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살면 그뿐이다.

 

3.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로 들어간다.

 이 책에서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은 모든 것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이니 불완전이 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완전이니 불완전이니 하는 것은 어떤 기준에 대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 세상에 그런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道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내가 괴로울 때가 있고 행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책은 『道德經』을 방편으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저자는 僧璨(승찬) 의 『信心銘』과 노자의 『道德經』에서 찾고 있다. 3조 승찬 대사는 말한다.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至道無難 唯嫌揀擇 ),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洞然(통연)히 명백하리라. (但莫憎愛 洞然明白). ” 노자는 인위적 노력의 중지와 더 나아지려 하지 않음(不尙賢) 말하였다. 이를 따라서 저자는 현재의 모습이 온전히 진실이며 道이니 이를 받아들이면 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준을 정하여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니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병폐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기준으로 정한 바에 따라 분별하고 나아가 자신을 얽어매어 결국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된다. 지금 여기 나의 모습이 진실이고 道이지 이것을 떠나 성스럽고 참된 진리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있는 내 모습을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좀 더 완전한 나를 꿈꾸고 그리 되려고 안달하며, 그래서 그것이 안 되니까 괴로워하고 그런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그러해야 할 무엇, 말을 바꾸면 부정되어야 할 무엇’은 없다. 그러해야 할 무엇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고, 교육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지, 본래 그러해야 할 무엇은 없다. 본래 그러해야 할 무엇이 없는데도 억지로 그렇게 하려한다면 그것이 번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道아닌 것이 없고 꼭 버려야 할 것이 없으며, 그렇게 되어야 할 무엇이 없다면 무엇이 남는가? ‘지금 여기 이대로’가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불변하는 실체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 뿐이다. 단지 분별심만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분별심이란 다른 말로 하면 집착을 말한다. “~ 해야 한다. ~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 집착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억지로 집착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불안은 어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분별심을 내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저절로 분별심이 나지 않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이 道아님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고, 변치 않는 실체가 없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조차도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님을 알 때 저절로 분별심이 사라지는 것이지 ‘분별심만 놓으면 돼.’ 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집착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고 해도 해도 그 동안에 생활하고 생각한 습관이 남아 자기도 모르게 분별하게 되니, 깨닫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수련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尙賢(상현)도 좋고 不尙賢도 좋다.

 賢, 聖, 誠, 善, 勤 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利(이)이다. 利가 자기 자신에게 향할 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利가 남이나 사회를 향할 때 賢이니 善이니 하고 이름한다. 勤이나 誠도 개인이나 사회에 대해서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尙賢은 좋은 것이다.

 

 佛性은 나아지지 아니하나, 지식과 지혜는 날로 나아질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지식과 지혜는 자기 자신을 안락하게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도 안락하게 한다. 좋은 지식과 좋은 지혜를 갖추어 세상에 유익한 것을 賢聖이라고 한다. 道아님이 없다고 해서 배고픈 것도 道이고 아픈 것도 道이며 불편한 것도 道이니 그냥 그렇게 배고픈 대로, 아픈 대로, 불편한 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다. 배고프면 배고프지 않은 방법을 찾을 것이요, 아프면 치료할 방법을 찾을 것이요, 불편하면 편리한 방법을 찾을 것이다. 사회가 평화롭지 않으면 평화의 길을 찾을 것이다. 賢聖의 본질은 알고보면 바로 이러한 길을 좀 더 잘 아는 것이다. 남보다 더 낫고 그래서 우쭐거리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마음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노력하여 賢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날로 날로 새롭고 또 새로워짐(日日新 又日新)”이 좋다. 자기가 좀 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싶다면, 그리고 더 賢聖하고 싶다면 부지런히 배우라. 그러므로 부지런한 것도 좋다.

 

 그러나 그러해야 하는 것은 없으므로 집착하지 말 것이다. 집착하면 고통이 따른다.

 

『金剛經』에서는 “집착하지만 말고 마음을 내라.(無住而生心)”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