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한글 지장경

지장경의 세계

서원365 2008. 1. 25. 20:06

 

1. 인과를 밝힘

 

  『지장경』은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인 인과응보를 설명하고 있는 경이다. “작은 악이라도 가볍게 여겨 죄가 없다 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후에 업보는 털끝만큼 작아도 받는 것이며, 부자간이라도 가는 길이 달라 대신 받을 수 없다.”(「지옥명호품」)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행위는 모두 업으로 쌓이게 되고, 그 업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본인이 져야 된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악업을 짓게 되면 벌을 받고 선업을 짓게 되면 복을 받는다. 나에게 어떤 삶이 오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업을 지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계가 엄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인과응보 사상이다.

 

 그런데 불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종교나 도덕은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의 복과 악행에 대한 처벌로서의 벌이 주어진다는 인과응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착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수도 없는 전설들이 있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리고 정상적인 종교라면 모두 이와 유사한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몇 가지에 의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답을 못한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장애인으로 태어나 뭇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런가?’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왜 불행한 일이 끊임없이 생기고, 심지어는 끔찍한 사고까지 일어나기도 하는가?’ 여기에 대해 신의 저주를 받았다든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처음 생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신이나 악마가 왜 저주를 내리는가? 악마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면서, 왜 생을 처음 시작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그런 불행이 오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몇 가지로 추측하였다. 하나는 지리적 환경 즉, 사는 곳이 명당인가 아닌가? 조상이 묻힌 자리가 명당인가 아닌가? 이러한 것들이 아주 중요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조상의 음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조상이 돌보아서 그렇거나 아니면 조상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지장경』은 이런 의문에 대해 다른 답을 내린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자기의 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생사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윤회하며, 이전의 삶이 원인이 되어 지금의 삶과 다음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수도 없는 생을 이미 살았으며, 앞으로도 수도 없는 삶을 살게 되는데, 어떤 모습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바로 윤회 사상이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윤회한다. 그 종류는 크게 6가지가 있는데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 바로 그것으로 이것을 육도 윤회라고 한다.

 

 그런데 전생이 현생을 결정하고 현생이 내생을 결정하여 앞의 것에 의해 모든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면 이것은 기계적인 삶이 되어버린다. 인과율에 따라 윤회가 이루어지지만 마음만은 예외이다. 마음은 항상 자율적인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지금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다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장경』은 인과율에 대해 한 가지 예외를 두고 있다. 즉, 자기가 지은 업은 결국 반드시 자기 받아야 하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대신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선행이 악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의 고통을 줄여 줄 수는 있다는 것이다. 악업을 대신 받지는 못하지만 선행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지장경』 제1품 「도리천궁신통품」에는 지장보살님의 전생이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한 이야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 겁 어느 생에 지장보살님은 브라만의 딸이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평소에 삼보를 가볍게 여겼으므로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렸다. 그 공덕으로 그의 어머니는 지옥에서 벗어나 천상에 났으며, 지옥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까지 지옥을 벗어났다. 이처럼 선행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는 내용은『지장경』 여기 저기에 참으로 많이 실려 있다.

 

 모든 생명체는 끝없이 윤회한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번뇌와 고통을 느낀다. 물론 천상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인간세에 고귀한 존재로 태어나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참으로 고생스럽고 번뇌에 싸여 있는 때가 참으로 많다. 이러한 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을 부처라고 부른다.


2.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같아

 그렇다면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다. 보통 우리는 좋은 것과 선을 다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실은 같다. 단지 좋은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면 ‘좋다’라고 하고, 그것을 남을 위해서 하면 ‘착하다’고 할 뿐이다.

행위나 사물 자체에는 선도 악도 없다. 그냥 그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상황에 놓여 생명체들과 관계를 맺으면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랬을 때, 다른 생명체를 위하는 행위를 선행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좋은 것을 추구하면 개인주의가 되고, 남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좋은 것을 추구하면 나쁜 사람이 된다.

 

선행의 가장 기본은 다른 생명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가장 금지해야 할 것은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고, 다음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이며, 다음으로 못살게 괴롭히는 것이다. 언어 폭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로도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 몸으로 하는 것이든 말로 하는 것이든 남을 괴롭히거나 남을 해치는 것은 모두 악행이 된다. 선행의 가장 기본이 다른 생명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적극적 선행은 다른 생명체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하든, 신체적 봉사를 하든, 아니면 말로써 하든 남을 위하는 것이 바로 적극적 선행이다.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종교와 도덕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위나 성격은 같지 않다. 『지장경』에서 말하는 불교의 선행의 범위는 인간을 넘어서 모든 생명체를 포함한다. 모든 생명체에 자비심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생명체는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으며, 서로 윤회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그 자신이 쌓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의 모습이 결정된다. 때로는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축생이 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며, 심지어 귀왕이나 신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는 신도 생명체이며 윤회를 하는 존재로 되어 있다. 『지장경』「교랑보시공덕연품」의 한 구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만약 불탑과 사찰, 불상, 보살상, 성문과 벽지불 같은 형상을 몸소 공양하고 보시한다면 삼 겁 동안 제석의 몸이 되어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제석이란 제석천의 준말로서 수미산에서 불법을 보호하는 신의 이름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창조의 신인 범왕이 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신도 본질적으로는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같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체를 나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는데서 자비심이 생긴다. 그러므로 선행의 대상이 모든 생명체가 될 수밖에 없고, 악행을 하지 말아야 할 대상도 모든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육식을 금한다. 육식을 하게 되면 자기가 직접 생명체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기에 대한 수요는 늘어, 결국 더 많은 생명체를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가축뿐만 아니라, 하찮은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식물도 생명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생명체를 먹지 않을 수는 없다. 생명체를 음식으로 먹되 반드시 먹을 만큼만 준비해서 먹고,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음식물을 버리면 죄받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그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생명체를 희생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의 이러한 주장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다른 생명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가 우주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존재가 어느 날 지구를 방문하여 우연히 지나가는 우리들을 생포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보다 월등히 뛰어난 과학적 능력과 힘을 갖춘 그들에게 우리 인간은 하찮은 존재로 느껴질 수 있다. 그때 그들이 우리 인간을 마음대로 죽이고, 고기로 먹고, 신체를 자기들 마음대로 떼어냈다가 붙였다가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의 관계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


3. 거대한 세계관

『지장경』은 불교의 세계관을 참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세계관은 한 마디로 무한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끔 사용하는데, 이 말이  『지장경』의 세계관을 참 잘 표현하고 있다.

 

 우선 시간적으로 보자. 시간과 관련하여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 겁(劫)이란 말이다. 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참으로 긴 시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방 1 유순(약 40리)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에 겨자씨 안 알씩을 꺼내서, 다 꺼내면 1겁이라고도 한다. (대단히 긴 시간이지만 컴퓨터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쉽게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장경』 곳곳에는 무량 아승지 겁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항하사 겁이라고도 한다. 항하사는 10의 52제곱, 아승지는 10의 56제곱, 나유타는 10의 60제곱, 무량은 10의 68제곱이다. 1 겁만 해도 대단히 긴 시간인데 거기에 항하사나 아승지나 나유타란 수식어가 붙으니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불가설(不可說),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말을 쓰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우주가 성(成 : 생성)겁, 주(住 : 유지)겁,  괴(壞 : 붕괴)겁, 공(空 : 텅빔)겁이 반복된다고 보는데, 성주괴공이 한번 순환하는 것을 대주겁이라고 한다. 이러한 순환이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시간관이다.

 

 우주나 생명체가 종말을 맞이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단지 한번 생성되었으면 한번 소멸되고 다시 생성되고 하는 것이 반복될 뿐이다.

 

 공간적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끼는 최대 범위를 세계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세계 즉, 지구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4대주·태양·달·수미산·6욕천·범천(梵天)을 모두 포함하여 1세계로 친다) 이러한 세계가 천 개 모인 것을 소천 세계라고 하고 소천 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인 것을 중천 세계라고 하며, 중천 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인 것을 대천 세계라고 해서 보통 삼천 대천 세계란 말로 표현한다. 구체적인 수로 나타내면 10억이 되니, 우주에는 적어도 지구와 같은 세계가 10억 개는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장경』 첫부분인 「도리천궁신통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도리천에 계셔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을 하셨다. 그때 시방(팔방과 상하를 합쳐 十方이라하고 시방이라고 읽는다) 무량  세계의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이 법회에 다 오셔서…”

 

 여기에도 보면 무량한 세계란 말이 등장한다. 이는 삼천 대천 세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수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한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생겨난 생명체는 부처가 되기 전에는 끊임없는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 죄업이 많으면 좋지 못한 인간의 모습이나 수라, 축생, 아귀, 지옥에 떨어진다. 차라리 멸망해버린다면 행불행과 고락을 못느끼므로 다행이지만, 멸망이란 없으므로 장구한 시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죄업을 다 갚으면 비로소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의 모습이 『지장경』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자기가 지은 업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므로 한 순간 한 행동을 신중하게 그리고 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4. 합리적인 내세관 

 불교의 내세관은 내가 본 많은 종교의 내세관과 비교하면 가장 합리적이다. 불교는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모든 생명체는 육도 윤회를 한다고 주장한다. 육도는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가지이다. 그리고 육도 각각에도 수많은 다른 길이 있다. 축생은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짐승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다. 지옥도 『지장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각자의 업에 따라 대단히 다양한 지옥의 길이 있다. 천상 세계는 보통 28가지가 있다고 불경에는 적혀 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역시 빈부귀천과 수명의 장단 등 다양한 길이 있으니 자기가 쌓은 업에 따라 다음 생에 받게 되는 길이 대단히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업이나 악업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생에서 짓는 업이 다양한데도 선과 악으로만 양분하여 하나는 좋은 곳으로, 다른 하나는 나쁜 곳으로 이렇게 간다고 한다면 누가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보통 선행을 한 사람이나 아주 많은 선행을 한 사람이나 같다는 뜻이 되고, 또 심한 악행을 한 사람이나 조금 악행을 한 사람이나 같다는 뜻이 되니, 모순일 수 밖에 없다.

 

 또 어떤 종교를 보면 선인과 악인으로 양분하여 선인은 천국으로 가고, 악인은 멸망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잘못된 생각을 품어 잘못된 삶을 살았다고 하여 아예 멸망시켜버린다면, 너무나 가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주관하는 신은 선신이라고 봐줄 수 없다.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고 난 뒤에는 새로운 출발을 할 기회를 주어야 사랑의 신이고 선신이 아니겠는가?

 

 『지장경』에 보면 지옥에 떨어져 고초를 당하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부처님이나 보살님, 그리고 많은 신들이 묘사되어 있다. 당연히 그래야 자비와 사랑의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나는 예전부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참 여러 가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비롯한 많은 생명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오늘 아침 먹은 음식들을 생각해보자. 쌀, 우거지 국, 김치, 된장, 무말랭이, 김 등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따뜻한 방 안에서 불을 밝혀 놓고 맛있게 먹었다. 음식물 하나하나를 보면 모두 생명체들이 희생된 것이다. 어찌 보면 미안하고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그 음식들이 나에게 와서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었는가? 그리고 따뜻한 방과 밝은 불빛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침 식사 한 가지만 놓고 생각해도 이러한데 나의 일생을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과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까치밥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어진 생명관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지장경』을 읽으면 더욱 간절하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식구는 『지장경』을 읽은 뒤부터 한 가지 작은 변화가 생겼다. 식사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육식을 가능한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고 나니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음식이나 반찬이 맛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정말로 다 맛있고 고맙다. 그리고 가족을 말할 나위 없고 직장이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감사하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원효대사께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셨다. 세상은 누가 봐도 동일한 세상을 보는 것이지만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보면 세상이 다 아름답고 고맙지만 반대로 불평과 미움의 마음으로 보면 세상이 또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에게 오는 과보(果報)는  엄청나게 다르다. 전자는 행복을 주지만 후자는 아주 큰 불행을 주기 때문이다. 『지장경』은 천상과 지옥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누구나 똑 같이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단지 내가 어떤 곳에 들어가 살 것인가 하는 것만 결정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6. 지장보살님의 대서원(大誓願)

『지장경』 은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다, 대승(大乘)의 핵심은 이타행(利他行)이다.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고해로부터 벗어나며, 아울러 모든 중생들을 고해로부터 제도해 내는 것이 대승이다. 자기 해탈만을 추구하는 소승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대승의 뜻을 구체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지장경』 이다. 『지장경』의 제1품인「 도리천궁신통품」에는 지장보살님의 대서원이 실려 있다.

 

 지장보살님은 아주 먼 과거 한때에 부자 집 아들이셨다. 어느 날 그 당시 부처님이셨던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님 앞에서 “저는 지금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겁의 육도 중생들을 위해 방편을 세워 모두 해탈케 하고 비로소 저도 성불하겠나이다.”라는 큰 서원을 내셨다.

 

 또 한번은 앞에서 적었듯이 브라만의 딸이셨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졌다가 딸의 공양 덕분에 천상에서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지장보살님은 각화정자재왕여래 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서원을 세우셨다. “저는 미래 겁이 다하도록 방편을 널리 세워, 죄고 중생들을 해탈시키기를 원합니다.”

 

 또, 「염부제중생업감품」에 보면 지장보살님은 아주 오랜 과거 겁에 한 작은 나라의 왕이었는데, 친구인 이웃 나라의 왕과 함께 일체성취여래님 앞에서 서원을 세우셨는데 지장보살님의 서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먼저 이들의  죄고를 제도하여 편안케 하고 진리를 얻게 하지 않으면 저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또 아주 오랜 과거 겁에 지장보살님은 광목이라는 여인이셨다. 그때 청정연화목여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서원을 세우셨다.

“만약 저의 어머니가 영원히 삼악도와 천한 신분과 여인의 몸을 받지 않는다면, 이후 수많은 지옥에 있는 삼악도의 모든 중생들을 맹세코 구해내어 지옥과 축생과 아귀 같은 악도를 영원히 벗어나게 하며, 이러한 죄보를 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한 후에 비로소 정각(正覺)을 할 것입니다.”

(200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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