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한글 법화경

법화경의 세계

서원365 2008. 12. 18. 19:42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법화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며,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부처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기 전에 다짐을 하듯이 미리 부처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면 못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더 설하지 않으리라. 만약 설하면 세상의 하늘이나 인간들이 놀라고 의심하리라.』

 그러자 사리불이 거듭 설해주시기를 청하였다. 부처님께서 거듭 말리셨다.

 『사리불아,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모든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들은 다 놀라고 의심할 것이며, 깨닫지 못하였으면서 깨달은 체 하는 오만한 비구는 장차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본성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본성이라는 일체의 본성이므로 세상의 이치와 본 모습을 말한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그것으로 성불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 취지로 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방편이었을 뿐 진리 모두를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부처는 무한한 능력을 갖추신 분이다. 시간적으로도 무한한 세계를 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무한한 세계를 다 볼 수 있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세계든 갈 수 있고, 또 가지 않아도 신통력으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 사리불아, 부처님의 지혜는 온 우주의 진리를 통달하였고, 과거와 미래의 일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다.

 * 모든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의 두 지혜는 매우 깊어 헤아릴 수 없다.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로도 알기 어렵다.

 * 사리불아, 부처님이 성취하신 진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므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뜻으로도 분별할 수 없으며, 성문이나 연각으로도 미칠 바가 아니며, 오직 깨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 부처님의 백호상으로부터 광명을 놓으시고 동방으로 18000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아래로는 아비지옥과 위로는 유정천까지 비추셨다. 이 광명으로 사바세계의 육도 중생들을 다 볼 수 있었고,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었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문도 들을 수 있었다.

 * 대통지승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가 매우 오래 되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 오래 되었지만 나는 여래의 지혜로 오늘의 일처럼 볼 수 있다.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분신 부처님들을 앉게 하시려고 다시 팔방으로 각각 이백만의 나유타 국토를 변화시켜서 모두 깨끗하게 하시고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가 없어지고 하늘과 인간은 다른 국토로 옮기셨다.

 이때 동방의 백천만억 나유타 항하 모래수와 같이 많은 국토에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 부처님들께서 각각 설법을 들으려고 이곳에 모이셨다.

 이와 같이 차례대로 시방세계에 계시던 분신 부처님들이 다 모여와서 팔방에 앉으시니 모든 방위의 사백만억 나유타 국토에는 여러 부처님이 가득하게 계셨다.

 * 넓고 긴 혀를 내미셔서 위로는 범천에 이르고 온갖 털구멍에서는 한량없고 수없는 빛과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비추시니, 많은 보배나무 아래 사자좌 위에 앉아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이렇게 백천 년을 채운 뒤에야 혀를 거두셨다.

 모두 한꺼번에 큰 기침을 하시며 함께 손가락을 튕기시니 이 두 가지 소리가 시방에 두루 차서 여러 부처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위의 내용은 ≪법화경≫에 설해진 부처님에 대한 내용의 일부이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은 신들의 왕인 제석천이나 범천왕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배운다. 왜냐하면 신들도 윤회를 벗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회를 벗어난 존재는 오직 부처님뿐이시다. 부처님은 절대 무아를 깨치고 무아에 이른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윤회한다. 한번 생겨난 생명은 사라지는 법이 없으며 자기가 만든 업보에 따라 계속해서 윤회한다. 그렇다면 윤회가 끝난 부처님은 어떠한가? 열반하면 끝인가? ≪법화경≫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신다. <여래수량품>에서는 부처님의 수명이 끝이 없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비유를 들지만 이 역시 끝이 없음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일 뿐, 한 마디로 무한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석씨의 왕궁에서 나와 가야성 가까운 도량에서 처음으로 위없이 높고  바른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성불한 지는 실로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 지났다.


 여기서 나유타는 10의 60제곱을 말한다. 1겁도 계산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데 나유타 겁이니 상상조차 어렵다. 성불한 지가 백천만억 나유타이니, 그 전에 보살의 몸으로 있었던 것, 아라한의 몸으로 있었던 것을 합치면 더욱 상상할 수조차 없다. 물론 이러한 것은 상징적인 수로써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이  최고의 경전이기도 하지만 가장 믿기 어렵기도 하다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그러한 분이시다. 일체의 진리를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실제로 볼 수 있는 분이며, 무한한 신통력을 가지신 분이며, 무한한 수명을 가지신 분이다.


 부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셨는데 왜 사바세계로 오셨는가? 물론 목적은 중생들을 제도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지구라고 하는 곳에 오신 이유는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청정하게 하고 모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오직 일대사인연을 가지고 세상에 출현하신다.


 부처님은 윤회를 벗어나신 분이다. 사람은 인과에 따라 윤회한다. 그리고 그 인과라는 것도 자기가 만든 업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결국 현재의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두 가지 측면의 생을 살아간다. 하나는 업에 따른 운명적이고 법칙적인 삶이다. 전생과 현생의 과거의 삶이 업이 되어 그 결과대로 받는 삶이 바로 운명적이고 법칙적인 삶이다. 그 업을 카르마(karmah)라고 한다. 그런데 인생이 단지 법칙적이고 운명적이기만 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차피 운명적으로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인간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렇게 해도 업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반드시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차츰 악업은 사라지고 대신 선과(善果)를 맺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윤회를 벗어나셨으므로 운명적인 삶이 없다. 모두 자기 마음에 따라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구의 인도를 보시고 저기로 가서, 나서 중생을 제도해야겠다고 결정하셨을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부처님 모습으로만 오시는 것은 아니다. 방편에 따라 가지 가지 모습으로 나며, 몸을 쪼개어 수많은 모습으로 여러 세계에 나실 수도 있다.


 묘음보살님은 몸이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하신다.

 범천왕의 모습으로 나타내시며, 제석천, 자재천, 대자재천, 천대장군, 비사문천왕 등의 몸으로 나타내신다. 혹은 전륜성왕의 몸으로 나타내시며, 소국왕, 장자, 재상, 관리, 바라문의 몸으로 나타내시기도 한다. 사부대중, 장자나 거사의 부인의 몸으로 나타내시기도 하고, 바라문의 부인, 동남동녀,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과 사람 아닌 갖가지 몸으로 나타내시어 ≪법화경≫을 설하신다. 모든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여러 가지 근심과 고통이 있는 어려운 곳에 나타나셔서 능이 다 구제하며 왕의 후궁의 몸으로 변화하여 이 ≪법화경≫을 설하시기도 하신다.


 위의 글은 <묘음보살품>에 있는 글이다. 보살님이 이러하실진대 부처님은 말할 나위 없다. ≪지장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나(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몸을 천만 억으로 나누어 널리 방편을 베푼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은 바로 깨닫고, 선한 과보가 있는 사람은 열심히 하여 깨달으며, 아둔한 사람은 오래 교화한 뒤에야 귀의한다. 업장이 무거워 존경하는 마음을 내기 참 어려운 사람도 있다. 각각 차별이 있으므로 몸을 나누어 제도한다. 여인의 몸으로, 천룡, 귀신, 산천 자연신, 재석, 범왕, 전륜왕, 거사, 국왕, 재상, 관리, 비구, 비구니.....등의 몸으로 나타나 교화하며, 부처의 몸으로만 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는 자는 악취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게 되니, 그대(지장보살)는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해탈시켜 부처님의 수기를 받도록 하라.


그리고 이렇게 하는 목적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요, 제도의 마지막 목표는 부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어찌해야 부처를 이룰 수 있는가?

 부처를 이루는 방법은  최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혹 부처님을 만나지 않고도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이르는 사람도 있다. 이를 벽지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에는 한계가 있고, 대단히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 생에서 부처님을 만나고 가르침을 받으며, 내생에서 또 부처님을 만나고 가르침을 받고 이렇게 해서 반복하다보면 부처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특별한 공덕과 선업을 쌓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부처님을 직접 만나 뵙지 못하면 차선의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즉 경전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모든 경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경전이 ≪법화경≫이라고 하고 있다.


 * ≪법화경≫은 모든 여래의 제일 훌륭한 법문이며 으뜸가는 설법이다. 여러 설법 가운데 그 뜻이 가장 높고 가장 깊다.

 * 어디서든 이 경을 말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반드시 칠보로 탑을 일으키되, 지극히 높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반드시 사리를 봉안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하면 ≪법화경≫ 가운데 이미 여래의 온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탑에는 온갖 꽃과 향과 영락과 증개와 당번과 기악과 노래로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라.


 ≪법화경≫을 대하는 것은 곧 부처님을 대하는 것과 같으며, ≪법화경≫을 외우거나 쓰거나 하는 공덕이 한량없이 클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권하고 ≪법화경≫ 설법 자리에 함께 가자고 권하는 것 역시 아주 큰 공덕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읽고 쓰고 그 뜻을 새기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아주 좋은 길임을 알 수 있다.


≪법화경≫을 받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법화경≫을 단순히 읽고 쓰기만 해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을 받든다는 것은 이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새긴다는 것으로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열심히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며, 돈독하게 행하면 누구나 부처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은 불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부처라는 말은 아니다. 나무 씨앗을 보고 이것은 나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법화경≫을 읽어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이룰 것이라는 수기를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경전 속의 사람들 뿐 아니라 누구나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가지고 읽고 외우는 공덕이 크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준다. 온 우주에 능력이 무한하게 미치는 분이며,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실 수 있는 분이며, 중생들을 끝없이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끝으로 모든 생명체는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의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현생에서 보는 인간의 삶은 나고 죽음이 있으며, 수많은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삶이다. 그러나 생명체는 윤회하지만 멸망하지는 않는다.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이어 보면 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삶이다. 그리고 그 삶들이 내가 만든 업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된다. 그리고 또 괴로움 삶을 벗어던지는 방법이 있음 알게 해주고 나아가 완전한 삶인 부처를 이루게 될 수도 있음을 ≪법화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받드는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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