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어본 소만 존재한다
지은이 : 월호
펴낸 곳 : 운주사
2009년 2월 3일 초판
*색깔 있는 글은 독자인 제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십우도(十牛圖)는 곽암 사원 스님의 저작이다. 수행인이 본 마음을 찾고 나아가 세상에 깨달음을 펴는 과정을 열 장의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평소에 십우도 해설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참 재미있고 쉽게 십우도를 해설해놓았다.
십우도는 열 장의 그림으로 되어 있고, 각 그림마다 송(頌)이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송을 중심으로 해설되어 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영문 번역문이 붙어 있다. 그러면 월호 스님의 해설을 따라가 본다.
십우도는 운문사의 십우도이다.
1. 尋牛(심우) : 소를 찾아 나서다.
마음은 어디에?
[그림]동자가 소를 찾아 수풀 우거진 곳 멀리를 바라보고 있다. 한 손에는 소를 잡아 맬 고삐가 들려 있다.
茫茫撥草去追尋(망망발초거추심) 아득히 펼쳐진 수풀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서니
水闊山遙路更深(수활산요로갱심)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力盡神疲無處覓(역진신피무처멱) 힘은 다하고 정신은 피로해 소 찾을 길 없는데
但聞楓樹晩蟬吟(단문풍수만선음)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매미 울음 소리뿐.
여기서 소는 “본 마음 참나”를 말한다. 그러므로 심우는 본 마음 참나를 찾는 것이다. 소를 찾으려 하나 막막하고 길은 멀어 몸과 정신이 다 피곤하다.
이 장(章) 중간에는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문답하는 ≪능엄경(楞嚴經)≫ 이야기가 나온다. 마음이 어디 있는가? 몸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중간에 있는가? 감각 기관에 있는가?
2. 見跡(견적) : 자취를 보다.
몸은 물거품 마음은 아지랑이
[그림]동자가 소 발자국을 발견한다.
水邊林下跡徧多(수변임하적편다)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芳草離披見也麽(방초이피견야마) 꽃다운 풀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縱是深山更心處(종시심산갱심처)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遼天鼻孔怎藏他(요천비공즘장타) 먼 하늘 향한 콧구멍 어찌 숨길 수 있으랴.
비공(鼻孔)은 본래(本來) 면목(面目)을 말한다. 본래 최초의 존재를 뜻한다. 이 자리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
3. 見牛(견우) - 소를 보다
성품은 공한 것
[그림]동자가 소 뒷부분을 보고 있는데, 소 전체는 보지 못한다.
黃鶯枝上一聲聲(황앵지상일성성) -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日暖風和岸柳淸(일난풍화안류청) - 햇볕 따사롭고 바람 온화해 언덕에 푸른 버들
只此更無回避處(지차갱무회피처) - 다만 이 회피할 수 없는 곳에
森森頭角畵難成(삼삼두각화난성) - 삼삼한 쇠뿔을 그리기가 어려워라.
성품을 보되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단계이다. 본 마음이란 분별심과 구분해서 성품이라고 부른다. 분별심을 떠난 자리 즉 성품은 공(空)하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자리가 본래면목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
그러면서 ≪금강오가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무심(無心)을 도라고 이르지 마라. 무심도 또한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다.』
수행의 목적이 그저 무심해지는 것이라면 목석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무심이란 전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망심(無妄心)을 뜻한다. 탐진치로 비롯되는 분별심이 걷힌 자리이다.
이 장(章)에서는 무아(無我)와 신(神)에 대해서도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 책의 설명을 빌지 않더라도, 불교에서는 신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라, 그 역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존재이다. ≪구약성서≫의 여호와는 이러한 불교의 신관(神觀)과 성격이 부합하고 있다. 창조를 하고 나서 “보기에 좋았더라.”고 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 ~ 하였음을 후회하는”모습으로 여기 저기 등장한다. 노여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면서, 무엇을 하려고 의도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치(痴)는 아닐지 모르지만 전지전능자로서의 모습은 분명히 아니다.
무아를 잘못 해석하면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기 쉽다. 주의해야 한다. 무아란 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역동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4. 得牛(득우) - 소를 얻다
습기 없애기 : 참회와 보시
[그림]동자가 소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渴盡精神獲得渠(갈진정신획득거) - 온 정신을 다하여 이놈을 잡았으나
心强力壯卒難際(심강역장졸난제) -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時有纔到高原上(시유재도고원상) - 어느 때는 고원 위에 올라갔다가
又入煙雲深處居(우입연운심처거) - 어느 때는 구름 속에 들어가누나.
돈(頓)과 점(漸)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박에 깨달아 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이 이제 시작인 사람도 있다. ≪아비달마론≫의 수소단(修所斷-닦아야만 끊어지는 번뇌), 견소단(見所斷-깨달음과 동시에 끊어지는 번뇌)를 이야기하면서, 깨달음과 함께 진정으로 닦아야만 하는 번뇌도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깨달아도 해오(解悟)의 단계에 머물며, 그때부터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에 쌓아온 습관이나 관념, 잠재의식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생으로부터 물려진 의식도 있다. 그러므로 머리 속으로는 깨닫고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깨닫기 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만약 깨닫자마자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면 그는 전생에 한량없는 수행을 한 사람일 것이다.
5. 牧牛(목우) - 소를 길들이다
습기 없애기 : 발원
[그림]소는 뿔을 뜯고 있고 동자는 옆에 앉아 있다. 누렁소가 가슴까지 하얗게 변해 있다.
鞭索時時不離身(편삭시시불리신) - 채찍과 고삐를 늘 떼어놓지 않음은
恐伊縱步入埃塵(공이종보입애진) - 멋대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봐
相將牧得純和也(상장목득순화야) -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羈鎖無抑自逐人(기쇄무억자축인) - 멍에 걸지 않아도 절로 사람 따르리.
‘목우(牧牛)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는 단계라고 한다. 고삐를 놓았지만 소가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4단계까지는 본 마음이 공한 것을 보고 습기를 다스리고 있지만 언제 또 과거의 업장이 되살아날지 마음을 놓은 수 없는 단계이다.
진정한 참회는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나 언제 다시 삼독이 차게 될지 알 수 없다. 비워진 그릇을 그냥 두면 안 되고 발원(發願)을 채워 넣어야 한다. 보살은 원생(願生)을 하고, 중생은 업생(業生)을 한다. 업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삶이고, 원생이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갈무리해서 창조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장(章)에서는 발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첫머리가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야 한다.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6. 騎牛歸家(기우귀가) - 소 타고 집에 돌아가다
습기 없애기 : 기도
[그림] 동자가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돌아간다. 소는 완전히 하얗게 바뀌어 있다.
騎牛迤離欲還家(기우이리욕환가) - 소타고 굽이굽이 집으로 돌아가니
羌笛聲聲送晩霞(강적성성송만하) - 피리 소리 저녁놀에 실려간다.
一拍一歌無限意(일박일가무한의) - 한 박자 한 곡조의 하량없는 뜻이야
知音何必敲脣牙(지음하필고순아) - 지음(知音)이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몸과 마음이 물거품, 아지랑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되어, 몸과 마음의 근본이 되는 성품 자리를 보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몸과 마음과 성품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번 단계에서는 기도를 통하여 일심 공부를 하게 된다. 즉 불보살과 한마음이 되는 기도를 한다.
마음 단계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째가 일심 공부, 둘째가 무심 공부, 셋째가 발심(發心) 공부이다.
내가 올바르게 원을 세우면 불보살은 바로 알아채신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보살을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불보살님과 동일한 마음가짐을 연습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는 관세음보살을 염하건 다라니를 독송하건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소리를 내는 이와 듣는 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7. 到家忘牛(도가망우) - 집에 도착하여 소를 잊다.
참선(1) : 몸이 사라지다
[그림] 동자가 집에 앉아 있는데 소는 보이지 않는다.
騎牛已得到家山(기우이득도가산) - 소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牛也空兮人也閑(우야공혜인야한) - 소 또한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紅日三竿猶作夢(홍일삼간유작몽) - 붉은 해가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 속이니
鞭繩空頓草堂間(편승공돈초당간) - 채찍과 고삐는 띠집에 할 일없이 놓여 있네.
기우귀가(騎牛歸家)가 기도를 통한 일심 공부라면 도가망우(到家忘牛)는 참선을 통한 무심 공부이다. 무심 공부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몸이 사라지는 경지, 둘째는 마음이 사라지는 경지, 셋째는 본 마음이 드러나는 경지이다. 몸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분별심이 사라진 후 본 마음이 드러난다.
8. 人牛俱亡(인우구망) - 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참선(2) : 마음이 사라지다
[그림] 그냥 원(동그라미) 하나만 있다.
鞭索人牛盡速空(편삭인우진속공) -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비어 있으니
碧天遼闊信難通(벽천요활신난통) - 푸른 허공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다.
紅爐焰上爭容雪(홍로염상쟁용설) -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을 용납하리오.
到此方能合祖宗(도차방능합조종) -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몸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분별심도 사라진 경지이다. 우리의 본 마음에서 분별심이 생겨나고, 분별심에서 몸뚱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참나로 향하는 길은 먼저 몸둥이 착(着)이 쉬고 분별심이 쉬게 되어 마침내 본 마음 참 나 자리가 드러나게 된다.
9. 返本還源(반본환원) - 본원으로 들어가다.
참선(3) : 본마음이 드러나다
[그림]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返本還源已費功(반본환원이비공) -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보니 온갖 공을 들였구나.
爭如直下若盲聾(쟁여직하약맹롱) - 차라리 당장에 귀먹어리같을 것을
庵中不見庵前物(암중불견암전물) - 암자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시비하지 않으니
水自茫茫花自紅(수자망망화자홍) - 물을 절로 아득하고 꽃을 절로 붉구나.
바다에 파도가 쉬면 그대로 파도가 되고 물거품에 거품이 꺼지면 그대로 물인 것과 같다. 몸에 대한 집착과 분별심이 사라지니 그대로 본 마음이 드러난다. 봄 마음 참나는 일정한 형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형상과 소리로도 나툴 수 있다. 만약 본 마음 참나가 일정한 형상이나 소리가 있다면 그 외의 것은 모두 본 마음 참나가 아닐 것이다.
눈앞의 세계인 계곡의 물소리와 산의 빛깔이 그대로 비로자나 법신불을 보여 주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지만, 공부를 하다보니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인 경계에 갔다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자리로 온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찾아 나서지 않은 것과 공부를 하여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완전히 다르다.
깨닫는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세상은 여전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를 보는 마음은 분별심에 싸여 있는 마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여실히 볼 수 있는 마음이다.
10. 入廛垂手(입전수수) - 저잣거리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행불 : 법륜을 굴리다.
[그림] 노승이 바랑을 메고 시장으로 향한다.
露胸跣足入廛來 - 맨 가슴 맨발로 저잣거리 들어오니
抹土途灰笑滿顋 - 재투성이 흙투성이 얼굴 가득 함박웃음
不用神仙眞秘訣 -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윈 쓰지 않아도
直敎枯木方花開 -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불교의 도리라는 것은 도술, 요술, 마법, 이런 것이 아니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남녀노소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한 순간에 생기를 얻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
법을 굴리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평상시에 만나면 빼앗기만 하고 달라고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처님의 말씀이 참 좋다고 권유하면 그 사람이 들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법륜을 굴릴 때 다른 사람이 따라주지 않으면 나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불법을 제대로 깨달으면 저절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기 싫지만 도리이니까 해야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아이가 어릴 때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우연히 자기 아이와 마주친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을 모른다. 그러면 당연히 특별한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계기가 마련되어 자기 아이인 줄을 알아버렸다. 그때부터는 아이에게 아무런 생각을 가지지 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법륜을 굴리는 것도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