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금강경

금강경-6 正信希有分 第六

서원365 2009. 7. 24. 07:30

〇 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님,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진실한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佛 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같은 말을 하지 마라. 여래 멸도 후 후오백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서 이 말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서, 이를 진실하게 여길 것이다.』

* 頗有衆生(파유중생) - 頗는 자못 파,

* 後五百歲(후오백세) - 우학의 해설

 初五百歲 - 부처님 열반 후 500년으로서 해탈 견고(堅固) 시대라고 한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해탈에 이르게 된다.

 第二五百歲 - 초백세 다음의 오백세, 선정 견고 시대라고 한다. 해탈하는 이는 적지만 정진하는 사람이 많다.

 第三五百歲 - 그 다음의 오백년을 말하며 다문(多聞) 견고 시대라고 한다. 부처님 말씀이 많이 읽히지만 정진하는 사람은 적다.

 第四五百歲 - 부처님 열반 후 1500 ~ 2000년이 되는 시기로서 탑사(塔寺) 견고 시대라고 부른다. 곳곳에 탑과 절이 세워지지만 외형적인 신앙에 머무는 시기이다.

 後五百歲 - 그 다음 500년이기도 하고 제4오백세가 지난 모든 시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투쟁 견고 시대라고 한다. 재물과 지위 때문에 서로 다투는 시기다.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生淨信者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다.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들께서 계신 곳에서 모든 선근을 심어서, 이 문장을 들고는 한 순간에 깨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들이다.』

* 善根(선근) - 착한 뿌리, 좋은 인연의 원인이 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행에서부터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수행과 정진을 모두 포함한다. 이를 적극적 선근이라고 한다면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소극적 선근도 역시 포함한다.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수보리야, 여래는 이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었음을 다 아시고 다 보신다.

 왜냐하면 이 중생들에게는 더 이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상도 없고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다.』

* 無法相(무법상) 無非法相 - 여기서 법(法)이란 색성향미촉 및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일체의 대상들이다. 일체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무상하다. 그런데 그 무상하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또한 새로운 상을 짓는 것이다. 제법이 공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공하다는 상도 짓지 않음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法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왜냐하면 이 중생들이 만약 마음으로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 법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법이 아닌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상을 취한다는 것은 곧 내가 무엇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상이 있게 되며, 동시에 취한다는 것은 곧 집착이 된다. 아상이 있으면 동시에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게 된다.

취한다는 것과 버린다는 것은 같은 개념이다. 취함이 없다는 것은 취함도 버림도 없다는 뜻이다.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러므로 마땅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아님도 취하지 마라.

 이런 뜻이므로 여래께서는 늘 설법을 하시되, 너희들 비구들은 내 설법을 뗏목의 비유로 알라.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는 어찌 비법을 취할 것인가?』

* 說誼의 해설 - 법을 취함은 다만 법이 비법임을 모르기 때문이며, 비법을 취함도 다만 비법이 곧 법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진법계(一眞法界)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이 없다는 것도 없다.

* 筏喩者(벌유자) - 筏은 뗏목 벌, 喩는 깨우칠 유, 뗏목의 비유. 뗏목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수단이다.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강을 건널 일이 없다면 더 이상 뗏목은 필요치 않다. 그런데 만약 강 건너서도 뗏목을 소중하게 여겨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언변이 있는 사람도 완벽한 표현을 할 수 없다. 더구나 부처님의 설법은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서 상대에 따라 설법이 달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설법이 말하고자 하는 뜻에 관심을 기울여야지 만약 문자에 얽매인다면 곧 진리에서 멀어질 것이다.

* 이 부분을 보면 부처님의 설법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세한 지 알 수 있다.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거니와, 또 곡해를 할까 염려 하여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 無比의 해설 - “눈 앞에 보이는 저것이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저 모든 것이 다 여래이다.” 이 도리를 바로 믿고 안다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상에 매달리지 않으면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고 우주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법이니 진리니 하는 것도 매달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법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