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금강경

금강경-13 如法受持分 第十三

서원365 2009. 7. 28. 20:34

○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님. 이 경을 어떻게 부르며, 우리들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니, 이 이름자로 너는 받들어 지녀야 한다.』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이유가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 만약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이란 말이 반야바라밀을 다 말한 것이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면 이는 더 이상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란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 가리키는 바를 볼 것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님,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 說誼 해설 - 이 같은 팔만대장경은 대저 누가 설해왔는가? 모름지기 믿어라. 말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비방함이 되고, 말이 없다고 해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 慧能 해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여래의 설법이 마음으로 얻은 것이 있는가?” 수보리는 여래의 설법이 마음으로 얻은 것이 없음을 알므로 “설한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여래의 뜻이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떠나게 하기위하여 반야바라밀법을 설하셨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듣고 그것을 듣고 다 보리심을 내어 무생(無生)의 도리를 깨달아 무상의 도를 깨닫게 하려하심이다.

* 일체가 무상(無相)하여 머무를 바가 없고, 얻을 바가 없으니, 문자와 말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더구나 문자와 말은 완전치를 못해 그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부처님 말씀이라고 해서 거기에 집착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 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 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 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하겠느냐 아니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님.』

『수보리야. 모든 미진은 여래가 티끌이 아니라 이름이 티끌임을 설하신 것이다. 여래가 설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이다.』

* 微塵(미진)과 世界(세계)

- 法輪 해설 - 가장 작은 것을 미진아고 한다.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세계라고 한다. 그런데 가장 작은 것이라는 말이나 가장 큰 것이라는 것 자체가 상대적인 말이다. 과거에는 티끌이 가장 작다고 여겼으나 분자나 원자가 발견되었고, 세계라는 것도 점점 넓어지고 있어 우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니 미진이라고 하는 것도 이름이 미진이요, 세계라고 하는 것도 이름이 세계이니, 미진이라는 실체나 세계라는 실체는 없다.

- 우학 해설 - 티끌은 마음의 티끌, 마음의 때, 먼지를 말한다. 미혹한 자의 마음은 티끌의 마음을 가진다. 즉, 티끌이라는 것은 일체 중생의 마음 위의 티끌이다. 그런데 여기 중생의 마음에 부처님의 분신이 끝없이 위대한 신통력을 발휘하여 청정한 마음을 열어간다. 그렇게 되면 티끌은 더 이상 티끌이 아닌 것이 된다. 티끌은 자성(自性)을 가지지 않는다. 세계는 미진 즉, 티끌의 마음이 활동하는 세간적 무대이다. 티끌의 마음이 이제는 다시 티끌의 마음이 아니다. 청정한 마음이 되면 거기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 그 어떤 것도 실체로서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는 무상(無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시간적인 변화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체는 그 실체를 찾을 수 없다. 한때는 분자가 최소 단위라고 하였고, 그 다음에는 원자가 최소 단위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는 다시 핵과 전자로 나누고, 핵을 중성자와 중간자와 양성자로 나누며, 다시 쿼크라는 단위를 나눈다. 그것이 마지막인가? 과연 소립자가 있는가? 세계라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어디까지가 마지막 범위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인식의 범위와 미지의 범위가 있을 뿐이며 그 경계는 끝없이 유동적이다. 그러니 세계나 미진도 그냥 세계나 미진이라고 할 뿐이지, 그 말에 집착하면 안 된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님. 32상으로 여래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32상은 상이 아니요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 三十二相(삼십이상) - 부처님은 서른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또 80가지의 특징적인 모습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32상이 부처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인가? 즉 32상을 가지면 부처이고 그렇지 않으면 부처가 아닌가? 부처가 일정한 외적 형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불법을 거부하는 생각이다. 불법이란 형상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꼭 부처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는 이러이러한 외적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교사와 교사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가?

이러한 설명은 이미 제5분에 나온 바가 있다.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甚多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목숨으로 보시하고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4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명해준다면 그 복이 더 많다.』

* 이와 같은 설명은 이미 제8분과 제11분에 나와 있다. 제8분에서는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한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과 비교하고 있고, 제11분에서는 갠지스강 모래수와 같이 많은 갠지스강의 모든 모래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채울 만한 7보로써 보시하는 복덕과 비교하고 있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여전히 유루(有漏)복인 것은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무루(無漏)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목숨을 수없이 희생하여 보시하는 복덕은 어떠한가? 이 역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복덕은 아니다. 나나 남이나 근본적인 번뇌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계속에서 더 큰 복덕과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