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4복음서

4복음서를 읽고

서원365 2010. 1. 27. 12:08

1. 두 가지 흐름

 

 복음서에는 일관된 두 흐름이 있다. 하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강조하는 흐름이다.

 

 전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예수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복음서 전체가 이것과 관련된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고 있다. 특히 뒤에 나온 복음서일수록 더 심하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마가복음에서는 예수 스스로 그리스도임을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의 출생에 대한 기록도 없다.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처음 이야기하는 장면은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이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는 내가 누구라고 하는가?”라고 묻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그리고 공관복음이 아닌 요한복음은 첫 부분부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시작한다.

예수는 난치병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며 물 위를 걸어 다닌다. 그리고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게 되고 다시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예언하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3일 만에 부활한다. 자기에 관한 일들이 예정된 일이며 이미 구약 성경에 기록되었음을 강조하고, 마지막 날과 심판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에 던져진다.

 

 두 번째 흐름은 사랑의 강조이다. 위의 첫 번째 흐름과는 사뭇 다르다. 심지어 천국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 나라는 너의 안에 있다.”

 

고 말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며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계명을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이다.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근본적이고 목표일까? 다음 말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그때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아,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

 의인들이 대답하였다. “주여,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습니까?” 임금이 대답하였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2. 약자 편에 선 예수

 복음서 속의 예수는 강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권력자, 부자, 지도층은 오히려 늘 비판의 대상이다. 예수의 주변은 늘 병자들, 가난한 사람들, 과부,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위의 두 번째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성장 배경이 바로 가난한 목수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예수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는 마가복음이 사실에 가장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마가복음보다 나중에 기록된 다른 복음서는 예수가 특별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추가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에 대한 예수의 가족과 친족들의 반응이다. 마가복음의 다음 기록이 흥미롭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친족들에게도 그다지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는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지만 강자들은 늘 비판한다. 부자와 낙타 얘기는 너무도 유명한 얘기다.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계명을 지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제가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이에 청년이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낙타는 밧줄을 잘못 번역한 것)

 

 진복팔단 역시 사회 약자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

.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러면서 가진 자들에게 대한 경고를 잊지 않는다. 누가복음에 있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거지는 죽어 천국으로 가고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어린 시절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3. 구약과 신약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구약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성경으로 봐주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은 구약 성서를 읽고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책이라고 하면서 손을 씻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추악한 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구약 폐기론도 이 때문이다. 물론 유치한 창세기와 같은 것도 이유이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 민수기 31장

모세가 군대의 지휘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였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보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다. 아이들 중에서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라.”

* 출애급기 32장

모세가 진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오라 하니, 레위의 자손들이 다 모여 그에게 갔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다.” 레위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다.

 

 위의 글에서 여호와란 말만 빼면 모세는 극악한 독재자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모세 이후 분명해지는데, 그렇다면 구약에서 여호와는 어떤 존재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여호와는 유대인들의 수호신이며 민족 통합의 구심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정없는 징벌이 행해졌다. 모세가 만든 십계명도 이러한 목적을 담고 있음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구약에는 가지가지 추악한 것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신약에 나타난 예수의 행위는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 신약에도 유대의 왕이란 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구약에 나타난 것처럼 민족적 측면을 강조하지는 않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예수가 이단으로 몰려 죽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더 낫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할까?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다.”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않는구나.”

 

 예수의 관심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실 세계에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성격도 화내고 벌주는 신에서 차츰 사랑의 신으로 변모하게 된다.

 

4. 인간 예수

 

 복음서에는 두 가지 모습의 예수가 그려져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각종 이적을 행하는 모습이다. 물 위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며, 죽은 뒤 3일 만에 살아나기도 하여 결국 승천한다.

 

 또 하나의 모습은 화내고 고민하는 모습이다. 그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해, 결국 제자들은 남의 밀 이삭을 잘라 먹는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제자들을 두호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기관과 같은 상류층에 대한 반감도 들어 있다. 또 배가 고파 무화과나무로 갔는데 먹을 것이 없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는 도덕적 수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아주 평범한 모습이다.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는 고민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다음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장면이다.

 

베드로와 세베대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셔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여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러한 모습에서 자기도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와 같은 인간에게 애정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일까?

 

 그가 진복에 이르는 길을 알아낸 것은 틀림없다고 본다. 그것은 에고의 극복이다. 에고는 탐진치를 만들고 각종 번뇌를 만든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탓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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