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사니 ■/자투리

지혜를 얻은 아내

서원365 2011. 2. 24. 20:54

 내 아내는 몇 가지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었다.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색채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자기 미모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잘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졌는지, 기억력이 좋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옷을 고르는 안목은 여전히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하였고, 가족의 옷을 살 때는 항상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딸들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자기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학교 다닐 때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받은 적이 있는가 물어봤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자기를 닮아 딸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자기가 색에 대한 안목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즉, 근거 없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가족 모두 둘러 앉아 《금강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내가 해설을 하고 가족들이 듣는 식으로 했는데, 한 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고 해서 두 번 반복하고, 겨울이 다 지나가도록 반복해서 독송을 하였다.

 

《금강경》은 아름다운 책이다. 특히 제일 앞의 〈법회인유분〉에는 인격이 잘 갖추어진 아름다운 스승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나중에는 제자들이 수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늘 몸소 발우(스님들이 식사 때 사용하는 그릇)를 들고 탁발(스님들이 민가에 가서 먹을 것을 비는 행위)을 하셨다. 제자들을 시키지 않으셨다. 또한 누구에게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무엇을 묻든 무조건 믿으라거나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자세하게 설명해주곤 하셨다.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건의를 하면 조용히 판단해보고 합당하면 그 의견을 받아들이셨다. 〈법회인유분〉에는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은 늘 사시(巳時;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식사를 하셨고, 하루에 한 끼만 드셨다. 식사 때가 되면 발우를 들고 거리로 나아가 부귀빈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대문에 조용히 서계셨다. 그러다가 일곱 집을 다녀도 음식을 얻지 못하면 처소로 돌아와 조용히 자기의 행실을 반성하셨다고 한다. 늘 맨발이었는데, 처소로 돌아오면 손수 발을 씻으시고, 의발을 정리하셨다.

 

 우리 가족이 《금강경》을 읽고 난 뒤로 아내의 태도가 많이 변했다. 아내는 더 이상 자기가 색을 고르는 안목이 가장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의견을 내되 자기 생각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화를 거의 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본인도 편안하고 가족들도 편안하게 되었다. 남과 다툴 일도 거의 없어졌다. 아내는 화를 참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화를 낼 일이 현저히 줄어든 것 같다. 《금강경》을 읽고 화를 낼 필요 없다는 지혜를 얻은 것이 틀림없다.

 

《금강경》은 무주상(無住相)을 설한 경이다. 여기서 상(相)이란 고정된 모습이나 모양을 말한다. 일체는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한다. 즉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함에도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매달리면 번뇌는 일어난다. 그러므로 일체의 상을 버리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분별심을 내어, 자기의 고정된 생각을 짓고 그것에 매달린다. 물론 그것은 자기만의 생각이다. 무엇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규정하고, 무엇이 예쁘다거나 추하다고 규정하며, 무엇이 맛있다거나 맛없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들이다. 나에게 멋있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남에게는 그냥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들이다. 더구나 개인의 취향은 서로 다른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그런데도 자기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끝없이 다른 사람과 다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미워한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가장 괴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된다.

뿐만 아니라, 나의 생각과 분별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것과 비교해봐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뀐다. 옛날에는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틀리게 보이고, 지금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 나중에는 무의미하게 보인다.

《금강경》의 한 구절을 보자.

 

『수보리야, 비유하면 사람 몸이 크다고 하는 것과 같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님, 여래께서 사람 몸이 크다고 하신 것은 곧 큰 몸이 아닌 것이 되며,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구경무아분>

 

 크다 작다고 하는 것은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커도 더 큰 것에 비하면 작고, 아무리 작은 것도 더 작은 것에 비하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가리켜 크다고 고집할 것인가? 아름다움이나 맛, 멋, 높고 낮음, 길고 짧음 등, 이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고정된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집착하면 자기 자신도 괴롭고 남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데 내 아내는 이 점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을 읽은 뒤로는 상대적 개념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된 것이다. 요즘 자주 농담조로 하는 말이 있다.

“멋있다고 하지만, 멋있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하여 멋있다고 할 뿐이다. 맛있다고 하지만 맛있다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냥 맛있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눈에 멋있게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멋있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고집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니 상대적인 것 때문에 남과 대립할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간혹 자기도 모르게 옛 버릇대로 고집을 하다가도, 퍼뜩 상대적인 것에 집착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되니 화를 낼 일이 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재산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많다거나 적다는 것도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재산을 많이 쌓아놓아도 더 많은 것을 탐낸다면, 그 자신의 마음은 늘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끝없는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저 분수에 맞는 목표를 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노력할 뿐이다.

 

 지혜가 생기면, 지혜는 지혜를 얻은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 참다운 지혜는 그렇다. 위와 같은 간단한 것만 깨달아도 삶은 매우 행복해진다. 지혜는 교묘한 생각이나, 기상천외한 꾀를 내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고, 그에 맞게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참다운 지혜는 지혜를 얻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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