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육조단경

육조단경-5

서원365 2007. 8. 1. 20:10
 

남돈과 북점(南頓北漸)

* 南頓은 혜능대사의 가르침을 말하고 北漸은 신수대사의 가르침을 말한다.

○ 조사께서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법은 본래 한 종이건만 사람이 남북을 두고 법은 곧 한가지인데 지견이 늦고 빠름이 있다. 무엇을 頓漸이라 하는가? 법에는 돈점이 없건 만은 사람에게 영특함과 우둔함이 있으므로 돈점의 이름이 있게 된다.』


○ 신수대사의 제자 지성에게 조사가 물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에게 가르쳤느냐?』

『「마음을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관하여 눕지 말고 항상 앉아 지어가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관하는 이것은 병이요, 선이 아니다. 마냥 앉아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되랴. 내 게송을 들으라.』

生來坐不臥 死去臥不坐(생래좌불와 사거와불좌) - 살아서는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앉지 못하네

一具臭骨頭 何爲立功課(일구취골두 하위입공과) - 한 구의 냄새나는 뼈다귀로 어찌 공과를 세웠다 하랴.

○ 지성이 말하였다는 신수대사의 戒定慧(계정혜)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계요,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혜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정이다.(諸惡不作名爲戒 諸善奉行名爲慧 自淨其意名爲定)

6조가 말하였다.

마음자리(心地)에 잘못 없음이 自性의 戒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 없음이 自性의 慧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 없음이 自性의 定이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이 自性金剛이며

몸이 오고 몸이 감이 본래의 삼매니라.


○ 행창이 물었다.

『常과 無常의 뜻을 알지못하오니 바라옵건데 … 가르쳐주십시오.』

『무상이라 함은 불성을 말함이요 상이라 함은 곧 모든 선악의 제법과 분별심이다.』

『경에는 불성 이것이 상이라 하였는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무상이라 하시며, 선악 제법과 내지 보리심까지도 이것이 무상이온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상이라 말씀하시니 이것은 경문과 다르므로 의혹이 더합니다.』

『불성이 만약 상이라면 다시 어떻게 선악 제법을 설명할 것이며, 또한 劫(겁)을 다하더라도 한 사람도 보리심을 발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 까닭에 내가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상의 도리이다.

또 일체의 제법이 무상일진대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자성이 있어서 생사를 받아들일 것이니 그렇다면 眞相의 성품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상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의 뜻이다.』


당조에서 초청하다(唐朝徵詔)

○ 신룡2년(706) 측천황후와 중종이 설간을 시켜 6조를 궁으로 초청하였으나 병이 있다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에 설간이 도를 물어 대신 전하고자 하였다.


○ 좌선에 대하여

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깨치는 것인데 어찌 앉는데 있겠느냐? 경(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여래를 혹은 앉는다 혹은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邪道(사도)를 행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따라 올 곳도 없고 또한 갈 곳도 없는 까닭이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이 여래의 청정선이요, 모든 법이 空寂(공적)한 것이 여래의 청정좌니 구경에는 증득함도 없거니 어찌 하물며 않는데 있겠는가?


○ 도는 밝음도 어둠도 없느니라. 밝음과 어둠은 이것이 代謝(대사)의 뜻이라,  설사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역시 다함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서로 상대하여 그 이름을 세운 까닭이니라. 정명경에 이르기를  「법은 견줄 바가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하시지 않았던가?


번뇌가 곧 보리니 이는 둘이 아니며 다름도 없느니라. 만약 네 말과 같이 지혜로써 번뇌를 없애버린다면 이것은 2승의 견해요, 양거, 녹거 등의 근기인 것이니 상지(上智) 대근(大根) 은 모두 그렇지 않다.


○ 범부들은 明과 無明을 둘로 본다. 그러나 지혜있는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요달하나니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실다운 성품이니라.

실다운 성품이라는 것은 우치한 범부에 있어서도 덜하지 아니하며 賢聖에 있어서도 더하지 아니하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으며 선정 가운데서도 고요하지 않으며 斷도 아니며 常도 아니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으며 중간이나 안이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으며 본성과 형상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서 변천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道라 한다.


○ 不生不滅 -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멸이란 생을 멈추는 것이고 생이란 멸을 나타낸 것이라 멸도 오히려 멸한 것이 아니며 생하였다고 말하더라도 생한 것이 아니거니와 내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본래 스스로 남(生)이 없는 것이어서 지금 또한 멸도 없으니 이 까닭에 외도와 같지 않다.

네가 만약 심요를 알고자 할진대 다만 일체 선악을 전혀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자연히 청정 심체에 들어가 맑고 항상 고요하며 묘용이 항하사와 같으리라.


* 법은 상대를 떠난 것이다. 즉 상대란 생각이 만든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모습일 수 없다. 선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법문을 대로 보이다(法門對示)

○ 법해, 지성, 법달, 신회, 지상, 지통, 지철, 지도, 법진, 법여 등에게 법을 설하는데 근본 종지를 설함


○ 먼저 三科(삼과) 법문과 36對를 들어 말하리니 나고 듦에 양변을 여의고 일체 법을 설할 때 자성을 여의지 말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을 하되 모두 雙(쌍)으로 하여 다 대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因(인)하고 마침내는 二法(이법)을 모두 없애 다시 갈 곳을 없게 하라.


○ 三科 법문이라 하는 것은 陰(음)과 界(계)와 入(입)을 말함이니라. 음이라 함은 五陰(오음)이니 色(색)受(수)想(상)行(행)識(식)이요, 입이라 함은  12입이니 밖으로 六塵(육진)인 色(색)聲(성)香(향)味(미)觸(촉)法(법)과 안으로 六門(육문)인 眼(안)耳(이)鼻(비)舌(설)身(신)意(의)가 이것이요, 계라 함은 18계이니 육진과 육문과 육식이 이것이니라.


자성이 만법을 머금었으므로 含藏識(함장식)이라 하는 것이니 만약 思量(사량)을 일으키면 이것이 轉識(전식)이라, 육식을 내어 육뮨을 나와 육진을 보게 되나니 이와같이 18계 모두가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자성이 만약 삿되면 18邪(사)가 일어나고 자성이 만약 바르면 18正(정)이 일어나느니라. 악한 것을 머금고 쓰면 이것은 곧 중생의 用(용)이요, 착하게 쓰면 곧 부처님의 용이니라.

自性能含萬法 名含藏識 若起思量 卽是轉識 生六識出六門見六塵 如是 十八界 皆從自性起用

自性若邪 起十八邪 自性若正 起十八正 若惡用 卽衆生用 善用 卽佛用


○ 자성을 말미암아 對法(대법)이 있다.

* 무정물인 바깥 경계에 있는 5對 ; 하늘과 땅, 해와 달, 밝음과 어둠, 음과 양, 물과 불

* 제법의 모양을 딴 말에 있는 12對 : 말과 법(語法), 유색과 무색, 유상과 무상, 有漏(유루)와 無漏)무루), 색과 공, 동과 정, 청과 탁, 범부와 성인, 승과 속, 老와 少, 大와 小

* 자성이 용을 일으킴에 있는 19對 : 長과 短, 邪와 正, 痴(치)와 慧(혜), 愚(우)와 智, 亂(난)과 定, 慈(자)와 毒(독), 戒(계)와 非(비), 直(직)과 曲(곡), 實(실)과 虛(허), 험난과 평탄, 번뇌와 보리, 常(상)과 무상, 悲(비)와 害(해), 喜(희)와 嗔(진), 줌과 아낌, 進(진)과 퇴, 생과 멸, 법신과 색신, 화신과 보신


* 이러한 것들이 대법의 모두가 아니라, 그 당시의 대법의 대표적인 예이다. 痴는 어리석은 것이고 愚는 미련한 것을 말한다.


○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밖으로 相(상)에서 상을 여의고,  안으로는 空(공)에서 공을 여의어라. 만약 온전히 상에 집착하면 곧 邪見(사견)이 자랄 것이며, 온전히 공을 執(집)하면 무명이 자랄 것이다.

공을 집착하는 사람은 經(경)을 비방하면서 곧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하나, 만약 이미 문자를 쓰지 않을진대 사람과 말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하겠으니 말이 또한 바로 문자의 相(상)임을 어찌하랴.


○ 만약 상에 착하여 밖을 향하여 作法(작법)하여 참을 구하거나 혹은 넓은 도량을 세우고 유무의 허물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몇 겁을 다하여도 견성하지 못할 것이니 너희들은 다만 법을 듣고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라.


○ 일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수행이라 하지 말라. 道性이 막히고 장애가 되리라. 만약 법을 닦지 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삿된 생각(邪念)이 나게 하나니 다만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여 머무름이 없이 법을 베풀도록 하라.


* 兩邊(양변)이란 대개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 자체의 본성이 아니다. 어떠한 사물도 그 자체로는 양변이 없다. 동과 서를 생각해보자. 어떤 A지역이 동쪽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A지역이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지역에 비해 동쪽에 있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A 지역보다 더 동쪽에 있는 지역에 비한다면 서쪽에 있는 것이 된다. 이때 기준을 A지역 자체로 삼는다면 그것은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니며, 온 우주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동이니 서니 하는 것이 어찌 그 지역의 본성이 될 것인가?


유통을 부촉하다(付囑流通)


○ 태극 원년(712)년 7월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세우고 이듬해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7월 1일에 문도 대중을 모아놓고 8월에 세상을 뜰 것이라고 말하자 문도들이 매우 슬퍼하였다. 신회만이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육조)가 말하였다.

『너희들이 슬퍼함은 대개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슬퍼할 리가 없다.

법성에는 원래 생멸이나 거래가 없는 것이다. 너희들 모두 앉아라. 내 너희들에게 게송을 주리라. 이름을 眞假動靜偈(진가동정게)라 하니…』


○一切無有眞(일체무유진)  일체 만법에 眞(진)이란 없다.

  不以見於眞(불이견어진)  그러므로 진이 있다 여기지 말라

  若見於眞者(약견어진자)  만약 진이 있다고 보면 

  是見盡非眞(시견진비진)  이러한 견해는 모두 진이 아니다

  若能自有眞(약능자유진)  만약 능히 스스로 진이라 할진대

  離假卽心眞(리가즉심진)  거짓을 여읨이 마음의 진이다

  自心不離假(자심불리가)  제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고서는

  無眞何處眞(무진하처진)  진이란 없거니 어디에서 진을 찾으랴.

 

  有情卽解動(유정즉해동)  유정은 제대로 동하거니와

  無情卽不動(무정즉부동)  무정은 도무지 동하지 못하니

  若修不動行(약수부동행)  만약 부동행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同無情不同(동무정부동)  무정의 부동과 같으리

 

  若覓眞不動(약멱진부동)  만약 참된 부동을 찾으려 하면

  動上有不動(동상유부동)  움직임 위에 부동이 있음을 알라

  不動時不動(부동시부동)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無情無佛種(무정무불종)  무정에는 원래 佛種子(불종자)가 없느니라


  能善分別相(능선분별상)  능히 相(상)을 잘 분별하되

  第一義不動(제일의부동)  제1의엔 동함이 없으니

  但作如此見(단작여차견)  다만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면

  卽是眞如用(즉시진여용)  이는 바로 眞如(진여)를 씀이로다

 

  報諸學道人(보제학도인)  내 모든 학도인에게 이르노라

  努力用須意(노력용수의)  모름지기 힘써 이를 조심하라

  莫於大乘門(막어대승문)  대승문에서 공부하면서

  劫執生死智(겁집생사지)  도리어 생사지를 잡지마라

 

  若言下相應(약언하상응)  만약 언하에 상응했거든

  卽共論佛意(즉공론불의)  그때에 공론을 의논하거니와

  若實不相應(약실불상응)  만약 실다이 상응하지 못하였으면

  合掌令歡喜(합장령환희)  공손히 합장하고 환희심 내라

 

  次宗本無諍(차종본무쟁)  이 문안에는 본래 다툼 없으니

  諍卽失道義(쟁즉실도의)  다투면 도의 뜻을 잃으리

  執逆諍法門(집역쟁법문)  잘못이다 국집이다 서로 법문을 다툰다면

  自性入生死(자성입생사)  자성은 도리어 생사에 들리라.


○ 법보단경에 의지하고 법의는 전하지 않을 것임을 말함. 이유는 문도들의 信根이 순박하고 무르익어 큰 일을 감당할 만하기 때문이며, 달마대사의 게송에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건짐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피니

결과 자연히 이루리라.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너희들이 만약 種智(종지)를 성취하고자 할진대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달하여야 한다.

一相三昧(일상삼매) - 만약 일체에서 마음이 相에 머물지 않고, 또 한 저 상 가운데에 있으면서 밉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이익이 되나 이루어지나 등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평안하고 한가하고 고요하며 허공처럼 비고 통하고 또한 담박한 것

一行三昧(일행삼매) - 만약 일체의 행주좌와에 마음이 순일하고 直心(직심)이면 도량을 옮기지 않고 참으로 정토를 이루리니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 一相은 無相을 뜻함


○ 조사(육조)의 게송

   心地含諸種(심지함제종) 마음이 모든 종자를 머금었으니

   普雨悉皆萌(보우실개맹) 널리 비 내리니 모두가 싹이 튼다

   頓悟花情已(돈오화정이) 문득 꽃의 뜻을 깨닫고 나니

   菩提果自成(보리과자성) 보리의 열매는 어느듯 익었으리


○ 조사(육조)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들로 하여금 自心 중생을 알아 자심 불성을 보게 하는 것이니 불을 보고자 할진대 다만 중생을 알라. 다만 중생이 불을 미혹하게 할 것이요, 불이 중샘을 미혹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불이요 자성이 미혹하면 불이 중생이다. 자성이 평등하면 중생이 바로 불이요, 자성이 삿되고 험하면 불이 바로 중생이니 마음이 만약 험하고 굽으면 곧 불이 중생 속에 있는 것이요, 한 생각이 평등하고 곧으면 곧 중생의 성불이다.

내 마음에 참불이 있으니 이 自佛이 참부처이다.


○ 조사(육조)의 自性眞佛偈(자성진불게)

眞如自性是眞佛(진여자성시진불)  진여 자성이 참부처요

邪見三毒是魔王(사견삼독시마왕)  삿된 견해와 삼독이 마왕이라

邪迷之時魔在舍(사미지시마재사)  삿되고 미혹할 때 마왕이 집에 있고

正見之時佛在堂(정견지시불재당)  바른 견해를 가지면 부처가 집에 있다.


性中邪見三毒生(성중사견삼독생)  성품 속 사견이면 삼독이 생기나니

卽時魔王來在舍(즉시마왕래재사)  이것은 마왕이 집안에 옴이로다

正見自除三毒心(정견자제삼독심)  정견가져 스스로 삼독을 제하면

魔變成佛眞無假(마변성불진무가)  마왕이 부처되어 참일 뿐이라.


法身報身及化身(법신보신급화신)  법신과 보신과 화신의

三身本來是一身(삼신본래시일신)  이 삼신은 본래 한 몸이니

若向性中能自見(약향성중능자견)  성품 속 향하여 스스로 보면

卽時成佛菩堤因(즉시성불보리인)  즉시 성불하는 보리인이다.


本從化身生淨性(본종화신생정성)  본래 화신을 좇아 淨性(정성)이 나니  

淨性常在化身中(정성상재화신중)  정성은 항상 화신 중에 있어라

性使化身行正道(성사화신행정도)  성품이 화신 시켜 정도 행하면

當來圓滿眞無窮(당래원만진무궁)  당래에 원만하여 다함 없으리


淫性本是淨性因(음성본시정성인)  淫性은 본래 淨性因(정성인)이라            

除淫卽是淨性身(제음즉시정성신)  음을 제하면 정성신이다

性中各自離五欲(성중각자리오욕)  성품 속엔 스스로 오욕 여의었으니               

見性刹那卽是眞(견성찰라즉시진)  성품 보는 찰라가 즉시 진이라


今生若遇頓敎門(금생약우돈교문)  금생 만약 돈교 법문 만나게 되어                

忽悟自性見世尊(홀오자성견세존)  홀연히 자성 보면 세존 봄이라

若欲修行覓作佛(약욕수행멱작불)  수행하여 부처를 찾으려 해도               

不知何處疑求眞(부지하처의구진)  어느 곳에 眞 구할까 헤매다가도

若能心中自見眞(약능심중자견진)  만약 능히 심중에서 진 보게 되면                

有眞卽是成佛因(유진즉시성불인)  진이 있음이라 成佛因 되나

不見自性外覓佛(부견자성외멱불)  자성은 아니 보고 부처 찾고자         

起心總是大痴人(기심총시대치인)  마음을 일으킴은 모두가 癡人(치인)이다


頓敎法門今已留(돈교법문금이류)  내 이제 돈교 법문을 여기 남기니

敎度世人須自修(교도세인수자수)  세상 사람 제도하고 힘써 닦아라

報汝當來學道者(보여당래학도자)  당래의 학도자에게 내 이르노니 

不作此見大悠悠(부작차견대유유)  이런 견해 짓지 말고 크게 悠悠하라


○ 조사(육조)의 마지막 게송

兀兀不修善(올올불수선) 차분히 힘써서 선도 안 닦고

騰騰不造惡(등등불조악) 활활 놓아 지내 악도 안 지으며

寂寂斷見聞(적적단견문) 적적하여 보고 들음 모두 다 끊고

蕩蕩心無着(탕탕심무착) 탕탕하여 마음에 집착 없이 한다.


○ 조사(육조)는 76세로 遷化(천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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