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육조단경

육조단경-1

서원365 2007. 3. 4. 17:07
 

* 육조(六祖) -- 혜능(惠能)을 가리킨다.

인도에서 1조 마하가섭을 시작으로 달마까지 28대 조사가 있고, 달마가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의 1조가 되었다.

중국 : 1조 달마,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惠能)

* 혜능 -- 아버지는 盧氏, 어머니는 李氏이다. 638년(貞觀 12년) 중국 광둥 성[廣東省] 신싱[新興]에서 태어났다. 혜능은 젊었을 때 가난하고 무식했으며 장작을 팔아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장작을 지고 시장에 나갔다가 한 객승이 〈금강경 金剛經〉을 독송하는 것을 듣게 된 혜능은 불교에 귀의할 뜻을 굳히고, 당시 중국 불교의 중심지였던 중국 북부로 가서 선종의 제5대 조사로서 명망이 높은 홍인(弘忍)의 문하에 들어갔다. 5조가 법그릇임을 알고 법과 가사를 전하여 조사의 자리를 잇게 했다. 다른 제자들의 시기로 인하여 비밀리에 홍인의 법맥을 잇게 된 혜능은 676년 중국 남부의 광둥 성으로 돌아가 〈열반경 涅槃經〉의 대가 인종법사(印宗法師:627~713)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뒤 37년 동안 널리 가르침을 폈다. 혜능은 이처럼 즉각적인 깨달음, 곧 돈오(頓悟)에 대한 혁명적인 선언을 하여  점오(漸悟)를 옹호하는 신수의 북종선과 그의 남종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생기게 했다.

 

* 육조단경은 남종선 입장에서 혜능 계열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수를 비롯한 북종선 계열에 대한 기록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을 깨닫고 법의를 받다(悟法傳衣)

○ 혜능은 황매에 이르러 영남의 오랑캐라고 하여 업신여김을 많이 받았다. 오조는 혜능의 자질을 알아보았지만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아 해를 입을까봐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게 하였다.

* 지금은 中國이 나라의 명칭이 되었지만 이 당시만 해도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켰으며 변방은 여전히 미개한 지역으로 받아들여졌다.

 

○ 오조는 모든 문인들에게 게송을 짓게 하여 게송을 보고 깨친 사람이 있으면 법과 법의를 전하여 6조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神秀(신수)가 게송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 몸은 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 마음은 맑은 거울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 때묻지 않게 하라.

* 돈황본에는 惹가 有로 되어 있다.

* 마음도 몸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본래 공한 것이니 먼지가 쌓일 자리조차 없다.  그러나 이 게송은 수행하고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좋은 게송이다. 끝없이 일어나는 망상과 탐욕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무상함을 깨치면 좋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마음 속에 오고가는 망상과 헛된 욕심을 잘 단속하면 훌륭한 인격을 갖출 수 있다.

이 글을 보고 5조는 신수가 아직 문 안에 들지 못했음을 알았다. 이에 신수를 불러 새로 게송을 짓게 하였다.

 

○ 이틀이 지나 한 동자가 신수의 게송을 외는 것을 보고 게송이 적힌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하였다. 혜능이 글을 모르므로 마침 옆에 있던 강주 별가에게 게송을 읽어달라고 하고 듣고는 역시 게송을 지어,  써달라고 하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 보리에 나무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 본래 하나의 물건이 없거니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랴.

*  돈황본에는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라고 되어 있고,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淸淨 何處惹塵埃라는 게송이 하나 더 있다. 뜻은 동일하다. 청정하다는 것은 더럽다는 말의 상대가 되는 의미에서 청정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것을 말한다. 자성이 본래 실체가 없으므로 더렵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 5조는 혹 대중들이 해칠까 하여 신으로 문질러 버리고, “이 역시 견성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다음 날 3경에 가만히 혜능을 불러 금강경을 설하였는데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는 데 이르러 크게 깨달았다.  혜능이 말하였다.

何期自性 本自淸淨(하기자성 본자청정) --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알았으며

何期自性 本自具足(하기자성 본자구족) --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알았으며

何期自性 本無動搖(하기자성 본무동요) --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何期自性 能生萬法(하기자성 능생만법) --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

 

○ 이에 의발(衣鉢)을 전하고 6조로 삼고 중생을 제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조는 게송을 말하였다.

有情來下種(유정래하종) -- 유정이 와서 종자를 심으니

因地果還生(인지과환생) -- 인지에서 도리어 결과가 생기네.

無情旣無種(무정기무종) --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니

無性亦無生(무성역무생) -- 성품도 없고 남도 없도다.

* 본래 자성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신수 대사가 지었다는 게송은 자성에 실체가 있는 듯이 되어 있다. 그래서 문 안에 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6조 대사가 지었다는 게송은 이를 분명히하고 있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고 동요가 없다. 因이 주어지면 인과에 따라 결과를 낼 뿐이다.

 

○ 5조는 이어 법의가 다툼의 실마리가 되니 더 이상 전하지마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수 노를 저어 전송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6조(혜능)을 해칠까 두려워한 것이다.

 

○ 법의가 6조에게 전해졌음을 알고 수백 명이 쫓았는데 그 중 장군을 지낸 惠明(혜명)이 가장 빨랐다. 6조가 법의를 바위 위에 펼쳐놓고 숨었으나, 혜명은 법의를 바위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혜명이 법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 왔다고 하자 6조가 나아가 법을 설하였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인고?”

혜명이 절하고 물러갔다.

 

○ 쫓는 사람들을 피해 사냥꾼들 틈에 끼여 15년을 지냈다. 사냥꾼들은 6조에게 그물을 지키게 하였는데 산 것은 놓아보내고, 식사 때는 고기 삶는 냄비가에 채소를 넣어 익혀서 채소만 먹었다. 15년만에 법을 펴기 위해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니 마침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하는 중이었는데, 깃발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하였다. 이에 6조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요.(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 부시풍동 부시번동 인자심동)”라고 하였다.

 

○ 인종이 황매(5조)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물었다.

“가르침이란 없고 다만 견성만 논할 뿐 선정해탈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선정해탈을 논하지 않습니까?”

“二法이 되기 때문이니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은 둘이 아닌 법입니다.”

“..... 불성는 常도 아니며 無常도 아니요 이런 고로 끊어지지 않는 것을 둘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며, 또는 하나는 善이며 하나는 不善이니, 불성은 선도 아니요 불선도 아니니 이런 고로 둘이 아니라 하는 것이며, 또는 蘊과 界를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있는 사람은 성을 요달하여 둘로 보지 않으니 둘이 아닌 성품이 불성입니다.“

* 二法(이법) -- 두 가지 상대가 되는 법. 선정해탈을 논하는 것이 二法이 되는 것은 해탈과 해탈 아님(속박)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해탈을 말하면 속박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탈이나 속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미혹하면 속박이 되고 깨치면 해탈이 될 뿐이다.

 

○ 대사(6조)가 설하였다.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간 사람이 다 본래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마땅히 알라. 어리석은 자와 지혜있는 사람이 불성에는 본래부터 차별이 없는 것이요 다만 미혹함과 깨친 것이 다를 뿐이다.(當知愚人智人 佛性本無差別 只緣迷悟不同 所以 有愚有智 : 당지우인지인 불성본무차별 지연미오부동 소이 유우유지)”

 

○ 摩訶(마하)는 크다는 말이니 심량이 광대하여 마치 허공과도 같아서 가이 없으며 또한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청황적백 등 빗깔도 아니며 위 아래도 길고 짧음도 없으며 성날 것도 기쁠 것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으며,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으니 제불의 국토도 또한 이와같이 다 허공과 같다. 세간 사람들의 묘한 성품도 본래 공하여 가이 한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자성이 참으로 공함이 또한 이와 같다.(世人妙性本空 無有一法可得 自性眞空 亦復如是 : 세인묘성본공 무유일법가득 자성진공 역부여시)

 

내가 지금 공을 설하는 것을 듣고 공에 침착하지 않도록 하라. … 만약 마음을 비워 고요히 앉는다면 곧 無記空(무기공)에 떨어질 것이다. 선지식아 세계 허공이 능히 만물과 색상을 갈무리하고 있어 일월 성숙과 산하대지와 샘이나 물골이나 또한 개울이나 초목 총림과 악인, 선인, 악법, 천당, 지옥이며 일체 대해와 수미 제산이 다 허공 가운데 있는 것과 같아 세인의 성품이 공한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자성이 능히 만법을 머금고 있는 것이 이것이 큰 것이니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중에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는 일에 선이나 악을 볼 때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또한 물들거나 집착하지도 아니하여 마음이 마치 허공과 같을 것을 이름하여 크다 하는 것이니 이 까닭에 마하라 한다.

 

○ 심량이 광대하여 법계에 두루하니 작용을 하면 요요분명(了了分明)하여 응용함에 곧 일체를 알며,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여서 거래에 자유로와 心體가 막힘이 없는 것이 반야다.

일체의 반야지는 모두 자성에서 나는 것이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니, 그릇 생각하지 않는 것을 참성품을 스스로 쓴다 하는 것이다. 하나가 참되면 일체가 참되다.…

 

○ 바라밀이란 … 피안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생멸을 여의었다는 뜻이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이는 (生) 것이니, 물에 물결이 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나니 이는 물이 항상 자유로이 통해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피안이 되는 것이다.…

凡夫(범부)가 곧 佛이요 번뇌가 곧 보리니 前念(전념)이 미혹하면 즉 범부요, 후념이 깨달으면 곧 불이라 전념이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가 되고 후념이 경계를 여의면 즉시 보리다.(凡夫卽佛 煩惱卽菩提 前念迷卽 凡夫 後念悟卽佛 前念著境卽煩惱 後念離境卽菩提 : 범부즉불 번뇌즉보리 전념미즉 범부 후념오즉불 전념착경즉번뇌 후념이경즉보제)

바라밀이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나, 실은 따로 건너 갈 곳이 없다. 깨닫고 보면 여기가 피안이요, 깨닫지 못하면 여기가 번뇌로 가득찬 차안이 되는 것이다. 차안과 피안이 다를 바가 없다.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과 밖에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약 본심을 알면 이것이 곧 본해탈이며, 만약 해탈을 얻었으면 그것이 반야삼매며, 또한 이것이 무념이다.(智慧觀照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 지혜관조 식자본심 약식본심 즉본해탈 若得解脫 즉시반야삼매 즉시무념)

 

어찌하여 무념이라고 할까? 만약 일체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라. 작용을 일으킨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착하지 않으며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六識으로 하여금 六門으로 나오더라도 六塵(육진) 중에 물들지 아니하고 섞이지 아니하며,오고 감에 자유롭고 통용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즉시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그이름이 무념이다.

 

○ 6조의 게송의 일부이다.

邪來煩惱至(사래번뇌지)--사념이 일 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正來煩惱除(정래번뇌제)--정념이면 번뇌가 가시는지라

邪正俱不用(사정구불용)--사와 정 모두 여의의 쓰지 않을 때

淸淨至無餘(청정지무여)--생멸없는 청정지에 이르렀더라

菩提本自性(보리본자성)--보리는 본래로 이 자성이라

起心卽是妄(기심즉시망)--마음을 일으킬 때 즉시 妄이라

淨心在妄中(정심재망중)--淨心이란 망념중에 있는 것이니

但正無三障(단정무삼장)--다만 正心이면 三障이 없네

世人若修道(세인약수도)--세간 사람 만약에 수도하는 데는

一切盡不妨(일체진불방)--일체 세간사가 방해 안 되니

常自見己過(상자견기과)--항상 스스로 제 허물 보면

與道卽相當(여도즉상당)--道와 더불어 서로 맞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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