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육조단경

육조단경을 읽고

서원365 2007. 8. 18. 10:17
 1. 실상을 본다.

 본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이 없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 대체로 선하다고 하는 주장이 많지만 악으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고, 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은 원래 공하다고 본다. 공하다는 것은 어떻게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고저장단도 없다. 生(생)한 바도 없거니와 생한 바가 없으므로 滅(멸)할 바도 없다. 본래 淸靜(청정)하다고 한 것도 더럽다는 말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空(공)하다는 뜻이다. 또한 공하다고 하는 것은 공한 모습도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성을 佛性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因이 주어지면 그에 맞게 결과를 낸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맑은 거울이 있으면 모든 물체가 투영되듯이 모든 것이 여기서 일어난다. 이를 眞空妙有라고 한다. 그래서 5조도

有情來下種(유정래하종) -- 유정이 와서 종자를 심으니

因地果還生(인지과환생) -- 인지에서 도리어 결과가 생기네.

라고 하였던 것이다.

 

 공한 것은 一切(일체)가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사물을 보고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크다 작다 등으로 표현하지만 사물 자체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이 분별하면서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모두 허상이다. 쌀알이 작은가? 대체로 작다고 하지만 모래알보다 크다. 먼지 알갱이보다는 엄청나게 크다. 분자와 비교해 본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땅콩이나 콩보다는 작으며, 주발과 비교하면 아주 적고, 지구와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 작다. 어느 것이 쌀알의 크기인가? 사실은 어느 것도 아니다. 일체가 이러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변해간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굳이 찾는다면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그 사실일 것이다. 모든 것 즉 일체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실상을 본다는 것은 실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無相(무상)을 有相(유상)으로 생각하여 집착하면 고통이 생긴다. 삶을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어떤 실체가 있다고 보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대신에 無相과 無常(무상)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번뇌는 더 이상 번뇌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사물을 보며, 자기의 욕망에 맞추어 사물을 보려고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색깔로 세상을 본다. 자기 자신을 불멸의 실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더라도 세상의 실상이 그렇지 많으므로 괴로움이 생긴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헤어지는 것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세상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괴로울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貪瞋痴(탐진치)를 三毒(삼독)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실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분별심을 억지로 안 내려고 한다고 해서 안 내지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안 내려 하면 오히려 그것이 고통이 된다. 지금까지 지어온 相들이 허상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분별심 자체가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고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동안 번뇌라고 느꼈던 것들이 낱낱이 보리임을 깨닫게 된다.


2.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낸다.

  그러면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를 볼 것인가? 즉 상대의 세계는 아무 쓸모없는 것인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말아야 할까? 정말 그렇다면 무생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백치나 정신이상자가 될 것이다.

 

 만두를 먹는다고 생각해보자. 만두를 먹을 때는 양이 맞게 먹어야 한다. 너무 많이 먹어도 안 좋고 너무 적게 먹으면 배고프다. 적당하게 먹어야 하는데 이러한 상태를 중용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중용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그러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중용이라는 것은 없으니 아예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용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로서 없다는 말일 뿐이지, 상황에 맞는 상태로서의 중용은 존재한다. 다만 실체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는 만두 5개를 먹는 것이 중용이지만 다른 사람 다른 상황에는 만두 2개가 중용이 될 수도 있다. 이를 파악하고 이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만두를 먹는데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 5개가 알맞았다고 해서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가버린 과거에 연연하며,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불안해 한다. 이 또한 妄念(망념)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걱정은 90%이상이 불필요한 걱정이라고들 한다.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 지금 여기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에 매달려 있다. 스스로 걱정을 만들어서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전혀 쓸모없는 망념이기만 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것 역시 지혜이다. 그러나 단지 미래에만 집착하는 생각이라든지 과거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망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를 생각하여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현재에 대비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의 태도이다. 그렇지 않고 현재만 생각한다면 되어지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순간적이고 본능적인 동물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도덕적인 문제는 어떨까? 도덕적 선악은 물론 일이나 물건 자체에는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것 역시 실체가 아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변치 않는 실체는 있지 않다. 더구나 선악은 관념이므로 당연하다. 그렇다면 착한 행동을 권하고 악한 행동을 말리는 것은 불필요한 것인가? 이 역시 물론 그렇지 않다. 인간 관계가 형성되고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도덕 뿐만 아니라 예절이나 법 모두 필요하다. 이러한 규범의 바탕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은 절대적 고정적 실체적 것이 아니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또 육조단경에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일체가 無相이므로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를 無住而生心이라고 한다. 도는 어렵지 않나니 단지 분별심만 내지마라고 한 『신심명』의 말이 판단을 멈추라는 말은 결코 아닌 것이다.


3. 바르게 노력한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므로 그냥 그렇게 지내면 될 뿐 더 이상의 나아지려는 노력은 불필요한 것인가? 자성은 나아질 것이 없지만 생활의 방편을 얻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배고프고 불편해도 그것을 전혀 못느끼고 행복하다면 모를까 배고프다고 느끼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불편하다고 느끼면 편리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좋은 생활의 방편을 많이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혜택을 줄 수 있다. 세종대왕은 반대를 무릅쓰고 엄청난 노력 끝에 한글을 만들어 우리 민족이 쉽게 자기 뜻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사람의 이러한 노력이 수많은 사람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노력은 본인에게도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남도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바른 노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바른 노력인가? 우선 집착함이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집착이란 자기가 마음대로 기준을 정해 놓고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준을 정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반드시 그 기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대신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되 결과도 받아들일 줄 안다면 고통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정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동의해준 적도 없고, 더구나 사회와 자연은 더더욱 동의해준 적이 없다. 이 세상은 자기 의사를 중심을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합리적인 자세를 가진다는 뜻이다.

 

 바른 노력이란 말에는 방법이나 수단이 바르다는  뜻이 들어있다. 즉 도덕적으로 바른 방법이어야 한다. 도덕적이란 앞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가장 적게는 남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요, 크게는 남을 사랑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이지 못한 방법은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방법이 효율적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자기 수양을 위해 일부러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수양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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