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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의 『아침부터 자정까지』

서원365 2008. 5. 1. 14:17
 

 고객이 오면 접시를 두드린다. 그리고 돈을 센다. 그리고 쟁반에 돈을 올려놓는다. 주인공 은행원이 늘 하는 일이다. 마치 기계의 톱니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일상이 반복된다. 이러한 은행원이 일상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실천에 옮긴 것은 우연한 착각에 의해서였다. 한 귀부인이 구비되지 않은 서류를 들고 와 돈을 인출하려 하였고, 그러는 과정에서 귀부인은 똑똑 접시를 두드리는 은행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담보로 잡히고자 한 팔찌를 한 손으로 빼기 어려워 은행원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은행원은 귀부인을 사기꾼으로 오인하고 은행의 돈을 털어 귀부인과 도주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귀부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단순한 착각이었음을 알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게 된다. 그런데 그의 도주는 실은 경찰로부터의 도주라기보다 일상으로부터의 도주였다. 눈 덮인 들판으로의 도주,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가정에서도 늘 있던 일들이 반복된다. 딸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수예를 하고 아내를 늘 하던 요리를 하고, 그리하여 은행원은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정을 나온다.

 

 제 2차 세계 대전 무렵의 유럽은 한 마디로 전체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본능이나 본성은 묻혀버리고 만다. 카이저는 이러한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본능과 본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를 열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당시와는 대조적으로 대단히 개인적이며, 나아가 이기적이기까지 하며, 많은 사람들이 본능에 따라 쾌락을 추구하고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카이저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상당히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은 분명히 당시보다는 많은 여유와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는 치밀하게 조직화되어 있으며 조직화된 이러한 사회 속에서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더 많은 여가와 여유에도 불구하고 점점 순간적이고 쾌락적으로 바뀌어 가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은행원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그는 은행에서 6만 마르크를 털었다. 거금이라고 생각된다. 거금을 가지고 그가 간 곳은 ‘6일 경주’가 열리고 있는 경기장이다. 1등, 2등, 3등에게만 배당이 나누어지는 경기이다. 은행원은 이 경기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기를 보고 열광하는 관중을 통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인류 공동체임을 발견한다. 그는 이 경주에 5만 마르크라는 큰 돈을 상금으로 걸게 된다. 관중들은 열광한다. 은행원이 말한다.

 “바로 이것이야. 끓어오르는 거야. 충만함이야. 봄날 폭풍의 흐느낌, 출렁대는 인간들의 무리. 구속으로부터 해방. 자유. 커튼이 올라가고-모든 벽들이 내려온다.”

 

 그러나 황실의 대공이 나타나자 갑자기 분위기는 돌변한다. 국가가 연주되고 대중들은 허리를 굽혀 신하의 예를 취한다. 크게 실망한 은행원은 걸었던 상금을 취소하고 경기장을 떠난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간 곳은 가면무도회장이다. 그는 모든 요리를 최고급으로 시키고 가면을 쓴 여자들과 함께 생명력 넘치는 어떤 것을 갈구하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공허함이다. 그는 지폐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무도회장을 나가버린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구세군 회관이다. 구세군 회관에서는 참회자들이 계속해서 참회의 의식을 치른다. 참회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나와 육체에 매달려 산 것을 참회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끝나면 구세군 장교는 하나의 영혼이 구제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과정에 이끌려 주인공인 은행원도 참회를 하게 된다. 아침에 은행을 털고 현상금이 걸린 도망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세상 모든 은행의 어떠한 돈으로도 세상의 어떤 가치도 살 수 없습니다. 지불하는 것에 비해 살 수 있는 것이 항상 더 적은 법이죠. 돈을 많이 지불할수록 상품은 점점 더 형편없어집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회관 안에 던진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외치던 사람들은 일제히 돈을 줍기 위해 서로 부딪히고 격투를 벌이면서 순식간에 회관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거기에는 그들이 참회를 통하여 강조하던 영혼의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  전쟁 중임을 강조하면서 은행원에게 100페니히의 자선금을 내라며 따라다니던 소녀가, 그리고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던 소녀가 은행원을 경찰에 신고하고, 그는 그가 탈출하고자 했던 세상의 법칙에 의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결국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죽음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표현주의란 말과 처음 만났다. 표현주의란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에 일어났던 예술 전반의 새로운 예술 운동이라고 한다. 현상보다는 현상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으며 이성보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면과 주관의 세계를 강조했다. 개인적 본능과 느낌보다는 전체적 의무나 이성을 강조하면서 전체 속에 개인이 버렸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볼 때 자연스런 예술 운동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시도일 뿐 그것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서 이상향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은행원이 일상 탈출을 성공하여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일상이 되어 그를 권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처럼 표현주의의 시도는 기존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공하는 대신 또 다시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를 제공할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표현주의는 이성과 전체적 규범에 의해 억제되어 온 본능과 본성을 진실한 모습으로 보고 이를 표현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개인이 강조되고 개인의 느낌과 개성과 체험이 강조되고 발산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전체주의 시대에는 전체가 개인을 억압하였지만 지금은 본능적이고 쾌락적인 측면이 그 개인을 무너뜨리고, 이로 인해 생겨난 각종 범죄들이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끝없이 생기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연속이 아닐까? 이러한 노력이 필요 없게 되는 순간 인류는 오히려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200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