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불교 자료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7) - 계율의 제정

서원365 2009. 3. 6. 19:36

 

10. 계율의 제정


 가. 늙은 비구를 돌보라.

 부처님의 제자들은 점점 늘어나 그 수가 2만 명을 넘겼다. 수가 많아지니 승단 내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계율이 정해졌다. 그러므로 불교의 계율은 한꺼번에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은 자신이 스승이지만 제자들의 의견에 귀기우려 합리적 결정을 하셨다. 결코 권위로 누르지 않으셨다. 또 제자들의 의문이 있어 여쭈면 차근차근 이해할 때까지 설명하셨다. 결코 무작정 ‘내 말이 진리이니 믿으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승단에서는 항상 진지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불교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 중에 불교를 잘못 이해하여 잘못된 길로 가기 쉬운 것이 바로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허무주의로 파악했다면 불교를 오해한 것이지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불교의 요체는 일체를 여실(如實)히 알아, 합리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늙고 병든 비구 한 사람이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항상 두 명 내지 세 명이 함께 기거하고 서로를 돌보고 화합하라.”

라는 계율을 내리셨다. 그러나 이 계율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한 늙은 비구가 병들자 손수 그 비구를 간호해 병이 낫게 하셨다. 권위로써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실행함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나. 선배 비구를 존경하라

 우팔리라는 사람이 출가하였다. 그는 가난한 이발사였다. 그는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청년들이 자기 집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출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서둘러 가다보니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청년들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께 가서 출가의 희망을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는 이를 흔쾌히 허락하셨다.

 얼마 있지 않아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청년들이 출가를 하기 위해 부처님께로 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출가하고 싶다면 우선 여기 있는 선배 비구인 우팔리 상좌에게 정례(頂禮)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출가할 수 있다고 공표하셨다. 비구들은 출가한 순서대로 자리를 정해 앉았으며 선배 비구를 존경하게 했다.

 뿌리 깊고 확고한 4성제도가 있는 인도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조처였다. 그리고 경(經) 곳곳에는 법(=진리)앞에 누구나 평등함을 설한 말씀이 있다.

 * 우팔리(Upali;優波離) - 부처님의 10대 제자, 지계(持戒) 제일이라고 불린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그는 천민 계층이었으나, 부처님께 출가 귀의하여 수행 정진하여 많은 수행자들로부터 존경받는 비구가 되었다.


 다. 삼귀의계

 우팔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을 삼귀의라고 합니까? 우리가 어디에 귀의하는 것을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합니까?”

“부처님은 깨달음이다. 일체의 실체를 깨달아 환히 알고 있는 자이다. 일체 중생이 삼악도에서 긴 잠을 자고 있는 것을 깨우는 자이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어디에 귀의하는 것입니까?”

 “귀의한다는 것은 욕심이 끊어지고 욕심이 없는 곳, 즉 열반에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자체가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다. 또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귀의한 자는 몸을 다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승가에 귀의하는 것은 어디에 귀의하는 것입니까?”

“어진 사람 즉,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 수행하는 이의 공덕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을 승가에 귀의한다고 한다.”


 라. 슛도다나왕의 죽음

 부처님의 부왕인 슛도다나왕이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라후라와 아난다, 난타를 데리고 궁중으로 들어가셨다. 백성들은 모두 왕의 죽음을 걱정하였다. 그 동안 슛도다나왕은 나라를 잘 다스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는 대국들이 주변의 소국들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때였으므로 백성들과 신하들의 걱정이 컸다.

 부처님께서는 입궁하여 백성들의 슬픔을 진정시켜주셨다. 그리고 부왕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말씀하셨다.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이제 번뇌도 없고 괴로움도 없습니다. 아버님이 이생에서 쌓은 공덕은 한량없이 청정합니다.”

 그리고 부왕이 세상을 하직하자 부처님께서는 직접 관을 메고 화장터로 향하셨다.


 마. 비구니 제도

 부처님께서 니그로다 숲에 계실 때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찾아왔다. 그리고 여자들도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셨다. 여자들이 출가하여 수행을 하게 되면 불법(佛法)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 뒤 부처님께서는 수행처를 기원정사로 옮기셨다. 부처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마하파자파티는 이번에는 아예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은 상태에서 다시 찾아와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청하였다. 먼 길을 걸어온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의지만은 확고하였다. 여전히 부처님께서는 여자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자는 출가해도 아라한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집요하게 여자들의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마지못해 허락하시면서 출가한 여인은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

 * 아난다는 보통 줄여서 아난(阿難)이라고 부른다. 10대 제자이며, 부처님의 사촌으로서 항상 부처님 곁을 지켰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이며, 이 때문에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부른다. 그는 용모가 가장 빼어난 제자이기도 했다. 원래 비구는 오른쪽 팔을 드러내고 왼쪽 팔에 옷을 걸쳤다. 그러나 아난다는 용모가 너무나 빼어나 많은 여인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했으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명하여 양쪽 팔을 모두 감싸게 옷을 입도록 하셨다고 한다.

 * 부처님을 모셨던 시자 : 부처님 옆에는 한 명의 시자가 있었다. 모두 여덟명이 차례로 시자를 하였다. 나가사말라(Nagasamala), 나기따(Nagita), 우빠와나(Upavana), 수낙캇따(Sunakkhatta), 사미라 불닌 춘다(Cunda samanuddesa), 사가따(Sagata), 메기야(Meghiya), 그리고 성도후 21년째 되던 해부터 25년간 아난다 존자가 시자를 하였다.

 * 비구니 제도를 허용하는 이 장면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부처님의 태도이다. 부처님은 결코 제자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거나 일방적으로 따르라고 지시하지 않으셨다. 계율을 만들거나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에도 제자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셨고, 때로는 자기 생각을 굽히시기도 하셨다. 진리를 설할 때에도 항상 제자들의 질문을 자세히 듣고 차근차근 설명하셨지, 이것이 진리이니 그냥 믿으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다른 한 가지는 비구니 제도이다. 사실 2500년도 더 된 그 당시에 여자에게 츨가를 허용하는 것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 봐도 이는 참으로 획기적이다. 수녀 제도가 있는 종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수녀는 보조적 역할 이상을 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도 극히 일부 교파에서만 여성 목사를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유수의 종교를 봐도 여성에게 남성처럼 성직을 허용하는 것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