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불교 입문

육바라밀

서원365 2009. 10. 5. 19:40

 불교의 최종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경지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태를 번뇌 속에 싸여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여기를 떠나 행복한 상태로 가는 것을 바라밀(paramita)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강을 건너는 것에 비유해서 이쪽에서 저쪽 강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쪽 강 언덕은 번뇌와 고통과 부자유 속에 싸여있는 삶이고 생사의 윤회에 얽혀 있는 삶입니다. 저쪽 강 언덕은 행복과 자유로운 삶이요, 생사윤회를 벗어난 삶입니다. 이쪽  강 언덕에서 저쪽 강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 육바라밀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신 방법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불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육바라밀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습니다.

 

 1) 보시(布施;dana) 바라밀

 

 한자로는 포시(布施)라고 쓰고 읽기는 보시라고 읽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베푸는 대상은 물건이 될 수도 있고, 육체적인 힘이 될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통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주는 재보시(財布施),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보시(法布施),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보호하여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보시(無畏布施)가 있다고 하지만,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에게 좋은 것을 베푸는 모든 것을 보시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善)이란 좋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자기를 위해 쓰면 그냥 좋다고 하지만 남을 위해 쓰면 착하다고 하지요. 보시는 좋은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면 반드시 그 복이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불교에서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가 비슷하다고 봅니다. 절에 가면 복전함이 있습니다. 복전이란 곧 복밭입니다. 복밭에 씨앗을 뿌리면 그것이 자라 큰 복을 이룬다는 뜻으로 복전함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복전함에 돈을 넣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넣은 것이 아니니까 이렇게 이름을 붙였겠지요.

부처님의 가르침 중의 하나는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 즉 선한 원인이 주어지면 반드시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한 원인에는 악한 과보가 반드시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보시는 어떤 것일까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마음, 즉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마음에 바탕을 둔 보시가 참다운 보시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에 바탕을 둔 보시라면 보시를 하여도 보시하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남과 둘이 아닌데, 즉 남이라고 느끼지 않는데 내가 남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 리 없지요. 하물며 보답을 바라는 보시라면 이름만 보시이지 참다운 보시가 될 수 없습니다.

 

 보시는 일체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수행입니다. 구속과 번뇌와 고통을 집착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보시를 통해 이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부처님의 세계에 들려한다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 생활하며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존재하는 모든 중생(생명체)들, 난생이거나 태상,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하겠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무수하며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였으나 실제로는 멸도된 중생이 없다.』

 

 끝도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그러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보시가 왜 수행의 바라밀인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 보시 바라밀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으로는 '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일체의 구속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경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가 청정하나니, 주는 자와 받는 자와 주는 물건의 셋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대품반야≫

『베풂 적어도 그 갚음은 크다. 작은 것이라도 베푸는 지혜는 큰 즐겁고 기쁜 일을 보게 하리라.』≪법구경≫

 

 2) 지계(持戒;sila) 바라밀

 

 계율을 지키는 것을 지계라고 합니다. 계율이란 자신의 생각과 버릇과 행동과 생활이 나쁜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아무렇게나 가지면 금방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행동의 결과는 업이 되어 자기에게 반드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을 쌓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선을 쌓은 일이 보시라고 한다면 악을 멀리하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한번쯤은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악을 짓기도 하고, 큰 잘못이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며 잘못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인을 쌓되 악업을 쌓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그 한 번과 작은 잘못을 조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 번 잘못을 저지를 때는 고민도 하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만 자꾸 하다보면 양심이 무디어져 나중에 가서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악행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작은 잘못을 자꾸 저지르다 보면 큰 잘못도 저지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비구스님은 250계, 비구니스님은 348계를 받는다고 합니다. 재가불자는 5계를 지켜야 하며, 5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살생하지 말라. (불살생;不殺生)

 둘째,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불투도;不偸盜)

 셋째, 음행하지 말라.(불사음;不邪淫)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불망어;不妄語)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말라.(불음주;不飮酒)

 

 다음 다섯 가지를 더하여 10계라고 하며 스님들이 지켜야 할 계율입니다.

 

 여섯째, 꽃다발을 쓰거나 향수를 바르지 말라.

 일곱째, 노래와 춤 풍류를 즐기거나 보지 말라.

 여덟째,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아홉째, 공양 때가아니면 먹지 말라.

 열째, 금 은 등 보화를 갖지 말라.

 

 3) 인욕(忍辱;ksanti) 바라밀

 

 고생스러움이나 욕(辱)됨을 참는 것은 인욕이라고 합니다. 넓게 보면 힘든 상황을 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욕된 일이 있어도 분노를 나타내지 않고 잘 참는 것이 인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했을까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상대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없다면 상대방에게 분노를 느끼거나, 아니면 무식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경멸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둘 다 수행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욕을 네 단계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복인(伏忍)으로 불쾌하거나 화나는 마음을 참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을 즐겁게 유혹하는 것도 참아야 합니다. 불쾌한 일 때문에 화내는 것 못지않게 유혹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고 낭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순인(柔順忍)입니다. 항상 참다보면 참아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자기도 모르게 참는 마음이 생겨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셋째, 무생(無生)인(忍)입니다. 인생과 세상을 살펴보니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또 실체가 없어 용서할 것도 없고 참을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마음이 평온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일 때, 아상이 없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옛날 마디마디 잘릴 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당연 화를 내고 한스러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었을 때를 생각해보니 그 생에도 아상이 없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금강경≫

 

 이 경우 가리왕이 불쌍해서 용서한 것도 아닙니다. 가리왕의 마음을 이해하니까 분노가 일어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인 인욕선인에게는 용서받을 어떤 것도 용서하는 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넷째, 적멸인(寂滅忍)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경지에 있는 사람의 인욕행입니다.

생사고해를 벗어나서 본래부터 적멸(寂滅)한 열반의 경지에서 분별과 차별이 없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어떠한 분별심이나 차별상도 없는 경지에서 인욕할 일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4) 정진(精進;virya) 바라밀

 

 부지런히 노력하여 수행하며 게으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속에서 오는 것이든 밖에서 오는 것이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쭉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흔들리고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여러 가지 탐욕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어리석어 그렇기도 하며, 여러 가지 유혹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또는 지금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에 깃든 버릇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모두 물리치고 한결같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악한 업을 짓지 않고 선하게 생각하고 행하도록 노력하며, 그 생각이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조금 깨달았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에 수행을 게을리 한다면 궁극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5) 선정(禪定;dhyana)바라밀

 

 선정은 진리를 깨닫는 중요한 방편으로서 선악경계에 물들어 혼란스런 마음을 고요히 하여 참마음을 찾아가는 수행입니다. 이 방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진리를 깨달으셨습니다.

 

 단지 고요히 하여 마음의 안정을 추구하고 성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마음을 직접 살펴 번뇌를 제거하여 청정한 마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선정을 하여 삼매에 이르게 되는데, 삼매란 마음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여, 하나에만 집중하며, 마음이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평온한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신(神)에게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일체의 실상을 밝히고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번뇌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므로 이 방법은 매우 중요한 수행법입니다.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고,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은 없다.

 진리는 선정과 지혜를 따르니, 열반에 이르게 한다.《법구경》

 

6) 반야(般若;prajna) 바라밀

 

 반야는 지혜라고 번역하지만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분별의 지혜를 넘어선 분별이 없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합니다. 위에서 다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 바라밀을 제대로 행하면 반야에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다섯 가지 바라밀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반야에 입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야 바라밀은 위의 다섯 바라밀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일상 생활의 지혜는 사리 판단을 하고 분별하여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야는 그러한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를 공(空)하다고 볼 때 비로소 이르게 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실상을 등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현실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지혜입니다.

 

 인간이 온갖 번뇌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대로 알면 탐착할 일도, 화낼 일도 없으니 번뇌 또한 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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