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한글 원각경

한글 원각경 정제업장보살장 제9

서원365 2010. 4. 11. 14:55

○ 정제업장보살장 제구

 이때 정제업장보살이 대중들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이마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돈 뒤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크게 자비로우신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해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모든 여래의 인지의 수행 모습을 널리 설하시어, 대중들로 하여금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게 하시고, 부처님께서 오래도록 부지런히 애쓴 경계의 모든 노력을 마치 한 생각처럼 보게 하시니, 저희들 보살은 매우 기뻐하고 위로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원각의 마음이 본래 성품이 청정하다면 어떻게 오염되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되고 어둡게 하여 원각에 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오직 원합니다. 저희들을 위해 진리의 본성을 깨닫게 하여 이 대중과 말세 중생들로 하여금 장래의 안목을 가지게 하여주십시오.』

 이 말을 마치고 오체투지 하였는데 이와 같이 세 번을 청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정제업장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여, 그대들이 모든 대중과 말세중생을 위해 여래의 이와 같은 방편을 묻는구나. 그대들은 자세히 들어라. 그대를 위해 마땅히 설명하겠다.』

 그때 정제업장보살이 가르침을 기쁘게 받들고 모든 대중들과 조용히 들었다.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헛된 생각으로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이 있다고 집착하여 이 네 가지 顚倒(전도)를 실제의 자기 실체로 삼는다.

이 때문에 곧 허망한 바탕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가지 경계가 생겨 거듭 허망한 것에 집착한다. 두 가지 허망한 것이 서로 의지하여 헛된 업의 길을 낳고, 허망한 업이 있으므로 헛되이 윤회를 보게 되며, 윤회를 싫어하는 자는 헛되이 열반을 보게 된다.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 수 없다.

 覺(각)이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을 거부하고 멀리함이 아니며,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覺(각)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움직이거나 쉬거나 다 미혹되고 어둡다.

 왜냐하면 無始(무시)이로부터 본래 일어난 무명이 자기를 주체로 삼아 일체 중생이 태어날 때부터 지혜의 눈이 없어 심신이 모두 무명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있으면 나와 더불어 따르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문득 증오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니, 증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명을 키우므로 도를 계속하여 구한다고 해도 모두 성취할 수 없다.』

『선남자여, 무엇이 我相(아상)인가?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몸이 건강하면 홀연히 자기 몸을 잊었다가 사지가 당기거나 늘어지는 등 몸의 섭생을 잘못하여 조금이라도 침을 놓거나 뜸을 뜨게 되면 내가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증득하여 취해야 비로소 나의 몸이 정체가 드러난다. 선남자여, 그 마음이 여래가 필경에 완전히 안 청정한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더라도 모두 아상이다.』

* 현완(弦緩) - 弦은 활 시위를 말한다. 줄이 팽팽한 것을 뜻한다. 緩은 느슨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둘 다 비정상적인 것을 말한다.

* 원래 원각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열반을 이룰 일도 없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아상이 생겨나니 이 또한 幻(환)이다. 그러므로 열반도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 역시 환이니 이 역시 아상이 있기에 증득할 것도 있기 때문이다. 원각에서는 증득하는 나도 없고 증득할 원각도 없다. 주객이 일치하여 느낄 대상이 없으니 느낄 내가 있다면 아상이 있는 것이다.

 

 선남자여, 무엇을 인상이라고 하는가? 모든 중생들이 마음으로 증득한 바를 깨닫는 것이다.

 선남자여, “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다시 “나”를 “나”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깨달은 바가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 또한 이와 같다. 깨닫는 것이 일체 증득한 것을 초월했다고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다 人相이 된다. 선남자여 그 마음이 열반이 모두 “나”라는 사실을 원만하게 깨닫는 것에 이르러 마음에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는 마음이 있으면, 증득한 이치를 없앴다고 해도 이를 모두 人相이라고 한다.

* 나가 아님(非我)을 증득함을 인상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무엇을 衆生相(중생상)이라 하는가? 모든 중생들이 마음으로 증득하여 깨달음으로 미치지 못하는 바를 말한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하되 ‘나는 중생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이 중생은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님을 아는 것과 같다. 무엇을 나가 아니라고 하는가? 내가 중생인 즉 내가 아니다. 무엇을 그가 아니라고 하는가? 내가 중생인 즉 그의 나도 아니다.

 선남자여, 다만 모든 중생이 증득하고 깨달은 것이 모두 아상과 인상이 되니 아상과 인상이 미치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중생상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무엇을 壽命相이라 하는가? 중생들이 마음이 청정하여 요달한 바를 깨달은 것을 말한다. 일체의 업을 아는 지혜는 스스로 업의 근본을 보지 못하니 마치 命根과 같다.

 선남자여, 만약 마음이 일체의 각을 비추어 보았다면 이것은 모두 번뇌가 된다. 覺과 所覺은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물로 얼음을 녹일 때 따로 얼음이 있어서 얼음이 녹는 것을 아는 얼음이 따로 없듯, 내가 있어서 나를 깨닫는다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 녹는 얼음이 있고 녹는 것을 아는 얼음이 따로 있지 않다. 열을 가하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 그러한 때 따로 얼음이 있어 녹아 물이 된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 원각 역시 이와 같으니 깨달으면 그냥 착각 속에서 생긴 허상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따로 허상이 있어 사라진 상태를 지켜보지는 않는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四相을 알지 못하면 비록 여러 겁 동안 부지런히 애써 수도를 하더라도 단지 有爲라고 할 뿐 마침내 일체의 성스런 과보를 성취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정법 말세라고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나를 잘못 알아 열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증득함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 것을 성취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면  그 집의 재산과 보배를 마침내 성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애착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열반도 사랑하며 나를 사랑하는 뿌리가 잠복하여 열반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며, 나를 미워함이 있는 자도 역시 생사를 미워하되, 애착이라는 것이 생사임을 알지 못하고, 따로 생사를 싫어하니 해탈을 못함이라고 한다.

 법이 해탈하지 못함을 어찌하여 아는가? 선남자여, 저 말세 중생이 진리를 익힘에 적게 증득하였음을 스스로 청정함으로 삼으니, 아상의 근본이 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법을 찬탄하면 곧 기쁜 마음이 생겨 곧 상대를 제도하려 하거나, 만약 그가 얻은 것을 비방하면 문득 화를 내니, 아상을 견고하게 잡고 藏識에 잠복시켜 모든 根에서 노닐면서 잠간이라도 일찍이 끊지 못했음을 알 것이다.

 선남자여, 저 수도하는 자가 아상을 제거하지 않았으므로 청정각에 들수 없다. 선나자여, 만약 “나”가 공임을 알면 나를 훼손하지 않으니, 내가 있어 법을 설한다면 아상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중생상과 수명상 역시 이와 같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病을 진리로 삼아 설명하니, 이런 고로 가련한 사람이라고 한다. 비록 부지런히 정진하나 모든 병만 얻으므로 청정한 원각에 들 수 없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四相을 알지못하면서 여래의 견해와 행한 것을 자기 수행으로 삼는다면 마침내 성취할 수 없다.

 혹 중생이 있어 얻지 못했으면서도 얻었다고 하고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증득했다고 하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고 마음에 질투가 생기는 것은 저 중생이 “나”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이런 고로 청정한 원각에 들지 못한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도를 이루기를 바라지만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많은 지식만을 더하려 하니 我見만을 더한다. 다만 부지런히 정진하여 번뇌를 항복받고 큰 용맹을 일으켜 얻지 못한 것을 얻고 끊이 못한 것을 끊어 탐욕과 성냄과 애착과 아만과 아첨과 왜곡과 질투가 경계를 대하여 생기지 않고 저와 나의 恩愛가 모두 적멸하면 부처님은 ‘이 사람이 점차 성취할 것’이라고 하신다. 선지식을 구하여 사견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구하는 바에 따로 증오하고 사랑함이 있으면 청정한 깨달음의 바다에 들 수 없다.』

* 도덕경에도 爲學日益 爲道日損(배우면 날로 얻지만 도를 하면 날로 던다.)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인간이 만든 지식을 더하면 자연의 도에서는 멀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세상의 알음알이는 그것이 幻이므로 오히려 도를 이루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릴 없이 지식을 더하는데 열중하니 오히려 그것이 道를 방해한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을 설하셨다.

정업이여 그대는 마땅히 알라.

일체 중생이 모두 我愛에 집착하기 때문에

무시이래로 허망하게 윤회하니, 四相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므로

보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과 증오가 생겨

모든 생각에 아첨과 왜곡이 있으므로 미혹과 어둠이 많아

원각의 성에 들 수 없다. 만약 찰라라도 깨달에 돌아갈 수 있으려면

먼저 탐진치를 버리고 법에 대한 집착도 마음에 두지 말면

점차 성취할 수 있다. 내 봄이 본래 있지 않으니

증오와 애착은 어디서 생기랴. 이 사람이 좋은 벗을 구하면

끝까지 사견에 빠지지 않으리라. 구하는 바에 다른 마음이 생긴다면

구경에 성취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