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 해석분 - 심생멸문 - 아리야식, 본각과 시각

서원365 2013. 8. 18. 09:41

  (3) 心生滅門(심생멸문)

  ① 心生滅(심생멸)

   ○ 阿梨耶識(아리야식)

心生滅者(심생멸자) 依如來藏故(의여래장고) 有生滅心(유생멸심),

心生滅(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는 것이다.

* 如來藏(여래장)이란 진여가 무명에 덮여 있는 것을 말한다.

* 元曉 : 依如來藏故 有生滅心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 성품의 청정한 성품을 여래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무명의 바람으로 생멸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한 것이다.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소위불생불멸여생멸화합) 非一非異(비일비이) 名爲阿梨耶識(명위아리야식),

소위 불생불멸과 생멸과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 이름 하여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 元曉[별기] :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생멸심과 더불어 심체가 둘이 아니며, 다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마음을 취하여 둘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依如來藏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아니하는 바닷물이 바람이 불어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니, 동(動)과 정(靜)은 다르지만 바닷물의 체는 하나이므로 정수(靜水)에 의해 동수(動水)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 元曉 : 不生不滅이란 위의 여래장을 말한다. 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움직여서 생멸을 일으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더불어 화합한다고 이름하니, 이는 아래 글에서 (‘본각’에서)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 不相捨離라고 한 것과 같다.

* 元曉 : 이는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생멸과 화합하는 것이지, 생멸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화합하는 것이 아니다. 非一非異란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그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과 다르지 않은 것이요, 늘 불생불멸을 잃지 않기 때문에 그 생멸이 불생멸심과 같지 않은 것이다. 또 만약 같은 것이라면 생멸식상(生滅識相)이 다 없어질 때 심신(心神)의 체도 따라서 없어지게 되니 단변(斷邊)에 떨어지게 되고, 만약 다른 것이라면 무명의 바람에 의해 훈습되어 움직일 때, 정심(靜心)의 체가 연을 따르지 않게 되니 이는 상변(常邊)에 떨어질 것이다. 이 두 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 진여는 불생불멸이나, 무명에 따라 생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래장은 진여가 무명에 덮여 있는 것이므로, 불생불멸인 측면과 생멸인 측면이 있다. 생멸하는 모습이 보이더라도 진여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마치 바닷물에 파도가 일어서 파도가 생멸하지만, 물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두 가지 측면은 하나는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

 

此識有二種義(차식유이종의) 能攝一切法(능섭일체법) 生一切法(생일체법)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識(식)은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거두며, 일체법을 낳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一者覺義(일자각의) 二者不覺義(이자불각의)

첫째는 깨달음의 뜻이며, 둘째는 깨닫지 못함의 뜻이다.

* 元曉[별기] : 묻기를 위에서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했고, 여기서는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니, 저 심(心)과 이 식(識)이 무슨 차별이 있는가?

답하기를 위에서는 이체(理體)에 나나가 일심이라 이름하였으니, 일심의 체가 절상(絶相)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뜻의 문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이제 여기서 식(識)이란 다만 수연문 내의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신려(神慮)인 점에서 일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 아라야식의 체가 각과 불각의 두 뜻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此識有二種義라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심은 넓고 식은 좁은 것이니, 심이 이문(二門) 내의 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문(門)은 넓고 뜻[義]는 좁으니 생멸문이 두 뜻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아리야식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 것이다. 진여는 본래 청정하고 본래 깨달아 있는 것이며, 생멸심은 불각이다.

* 阿梨耶識(alaya;아리야식) -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같은 말이다. a는 부정의 뜻. laya는 몰(沒)이라는 뜻.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고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삶 속에 일어난 모든 기억들이 저장되는 창고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 지운 ; 生滅(생멸) ① 生 -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염법(染法)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 고(苦)가 일어남.(流轉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일어나고 낙(樂)이 생김.(還滅門) ② 滅 -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정법(淨法)이 사라짐.(流轉門) 진여가 무명에 영향을 주어 염법(染法)이 사라짐(還滅門).

 

 

   ○ 覺(각)

     • 本覺(본각)과 始覺(시각)

所言覺義者(소언각의자) 謂心體離念(위심체리념)

말한 바 覺(각)의 뜻이라는 것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니,

* 謂心體離念(위심체이념) - 망념은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망념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찾으려 하면 마음의 본체를 볼 수 없다.

* 元曉 :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여읜다는 것은 망념을 떠나면 각(覺) 아닌 것이 없음을 드러낸다.

 

離念相者(이념상자) 等虛空界(등허공계) 無所不遍(무소불편) 法界一相(법계일상) 卽是如來平等法身(즉시여래평등법신),

망념을 떠난 모습이란 허공계와 같은 것으로,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법계가 한 모습이라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 等(등) ; 같다는 뜻.

* 元曉 : 허공계와 같다는 것은 마음 바탕에 어두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혜광명이 두루 법계에 비치기 때문에 둘이 아닌 하나로써 다를 것이 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 무명에 의해 마음이 동요하여 대상을 헛되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헛된 대상으로 인해 마음이 끌려 늘 고요하지 못하다. 그 대상이 헛된 것임을 깨달아 더 이상 끌리지 않으니, 망념이 사라진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 비추는 지(知)만 있을 뿐이다.

 

依此法身(의차법신) 說名本覺(설명본각).

이 법신에 의지하여 본각이라 말한다.

 

何以故(하이고) 本覺義者(본각의자) 對始覺義說(대시각의설) 以始覺者(이시각자) 卽同本覺(즉동본각)

왜냐하면 본각의 뜻이란 始覺(시각)의 뜻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며, 始覺이란 곧 본각과 같다.

 

始覺義者(시각의자) 依本覺故(의본각고) 而有不覺(이유불각)

始覺(시각)의 뜻이란 본각에 의한 것이므로 不覺(불각)이 있으며,

 

依不覺故(의불각고) 說有始覺(설유시각)

不覺(불각)에 의지하여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本覺(본각)이란 진여 그 자체이다. 누구나 본래 갖추어 있는 것이다. 그 본각을 깨달아가는 것을 始覺(시각)이라고 한다. 진여가 미혹에 덮여 있는 것을 不覺(불각)이라고 한다. 시각을 본각에 대비하여 말하면 아직 본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불각이 있다고 한다.

* 元曉[별기] : 각(覺)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한다. 본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심성(心性)이 불각의 모습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각조(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아래 글(‘삼대’)에서 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고 한 것과 같다. 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심체(心體)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 말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 때문에 차츰 각의 작용이 생겨, 궁극적으로 본각과 같아지니 이를 시각이라고 이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