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 해석분 - 심생멸문 - 불각

서원365 2013. 8. 26. 16:03

 • 不覺(불각)

  - 根本不覺(근본불각)

所言不覺義者(소언불각의자)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위불여실지진여법일고) 不覺心起(불각심기) 而有其念(이유기념) 念無自相(념무자상) 不離本覺(불리본각)

말한 바 不覺(불각)의 뜻이란 진여법이 하나임을 참답게 모르기 때문에 不覺心(불각심)이 일어나 망념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 생각이란 독립된 모습이 없고 본각과 떠나지 않는다.

* 앞에서 무명의 바람이 불어 자성청정심이 작용을 일으켜 심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파도가 바닷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망념 또한 진여를 떠나 독립된 모습이 없다.

 

猶如迷人(유여미인) 依方故迷(의방고미) 若離於方(약리어방) 則無有迷(즉무유미)

마치 방향을 잃어 혼란스런 사람이 방향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란스런 것과 같으니, 만약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혼란스러울 것도 없다.

* 元曉 : 옳다고 주장하는 동쪽의 개념을 여읜다면 다시 잘못된 서쪽의 개념도 없다. 그러므로 念無自相 不離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衆生亦爾(중생역이) 依覺故迷(의각고미) 若離覺性(약리각성) 則無不覺(즉무불각)

중생도 그러해서, 覺(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된 것이지, 만약 覺性(각성)을 떠나면 不覺(불각)이랄 것도 없다.

 

以有不覺妄想心故(이유불각망상심고) 能知名義(능지명의) 爲說眞覺(위설진각) 若離不覺之心(약리불각지심) 則無眞覺自相可說(즉무진각자상가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名義(명의)를 알아서 眞覺(진각)을 설명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불각이라는 마음을 떠나면 진각이라고 말할 만한 자체 모습은 없다.

* 能知名義(능지명의) : 말과 뜻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망상과 망념을 쉬면된다. 그런데 망상의 마음 때문에 따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깨달음이라는 이름과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깨달음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게 된다.

* 앞에서 모든 심식(心識)이 다 무명이라고 하였다. 바른 방향이 무엇인가라는 분별심을 놓아버리면 잘못된 방향이 없는 것처럼 분별 망상심을 떠나면 그대로 진여본각이 된다. 그런데 진여란 여실공(如實空)이어서 뭐라고 말한 만한 것이 없다.

* 元曉 : 본각도 불각을 기다린다다는 것을 밝혔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以有不覺妄想心故라고 한 것은 무명이 일으킨 망상의 분별이니, 이 망상으로 말미암아 명의(名義)를 알기 때문에 언설(言說)을 두어 진각(眞覺 )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진각이라는 이름이 망상에 상대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불각을 여의면 설명할 만한 진각의 자체 모습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진각이라고 말하는 바가 반드시 불각에 상대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상대하지 않는다면 자상이 없으며 다른 것을 기다려서 있는지라 또한 자상이 아니니, 자상이 이미 없는데 어찌 타상(他相)이 있겠는가?

* 憨山 : 이 불각은 바로 진여각성의 전체로 성립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약 불각의 망상심을 떠난다면, 불각에 상대되는 개념인 진여 각성의 그 자체 모습을 따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무명 불각이 바로 본각과 분리하지 않는 상즉관계이기 때문에 중생이 일념에 본각의 광채로 돌이키기만 하면 즉시 본래 지녔던 본각과 동일하다. 그 본각이 무념임을 알면 즉시 진여법신을 증득하게 된다.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三細(삼세)

復次依不覺故(부차의불각고) 生三種相(생삼종상) 與彼不覺(여피불각) 相應不離(상응불리) 云何爲三(운하위삼)

다시 다음에 不覺(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相(상)을 내되, 저 근본 不覺(불각)과 상응하여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셋이라 하는가?

* 위의 근본불각에서는 불각과 각을 설명하였고, 여기서부터는 무명으로 인하여 마음이 동요하여 여러 심식 작용이 일어나서 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一者(일자) 無明業相(무명업상) 以依不覺故心動(이의불각고심동) 說名爲業(설명위업)

첫째, 無明業相(무명업상)이니, 깨닫지 못함 때문에 마음이 동요하는 것으로, 이를 業(업)이라고 말한다.

 

覺則不動(각즉부동) 動則有苦(동즉유고) 果不離因故(과불리인고)

깨달으면 움직임이 없지만, 움직이면 고통이 따르니 결과는 원인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본각 또는 진여는 움직임(흔들림)이 없다. 진여를 여실히 본 사람 또한 움직임이 없으나 무명으로 인하여 심식이 움직이게 된다. 동(動)이란 심식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12연기로 본다면 무명으로 인하여 행(行)이 있는 것이다. 아직은 주․객이 분화되지 않는 상태이다. 업상(業相)

* 果不離因(과불리인) : 각(覺)과 부동(不動), 동(動)과 유고(有苦)는 각각 인(因)과 과(果)를 이룬다.

* 元曉 :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뜻이 바로 업(業)의 뜻이니, 心動 說名爲業이라고 한 것이다. 覺則不動이란 반대를 들어서 나타낸 것이니, 시각을 얻을 때는 곧 동념(動念)이 없는 것이다. … 動則有苦란 것은 적정(寂靜)을 얻으면 곧 극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움직이면 곧 고통이라고 한 것이다.

 

 

二者(이자) 能見相(능견상), 以依動故能見(이의동고능견) 不動則無見(부동즉무견)

둘째, 能見相(능견상)이다. 움직임 때문에 볼 수 있으니, 움직임이 없으면 봄이 없다.

* 이를 12연기에서는 식(識)이라고 한다. 이는 주관이다. 견상(見相), 전상(轉相)

* 元曉 : 능견상이라는 것은 곧 전상(轉相)이니, 앞의 업상에 의해 점차로 능연(能緣)을 이루기 때문에 以依動能見이라고 한 것이다. 성정문(性靜門)에 의한다면 능견이 없기 때문에 不動則無見이라고 말한 것이니, 도리어 능견이 움직임에 의지하여야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상이 비록 능연이 있으나 반연하는 바의 경계상을 아직 나타낼 수 없으니, 이는 다만 밖으로 향하는 것일 뿐, 경계에 의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憨山 : 능견상을 전상(轉相)이라 하는 이유 - 진여를 본각의 실지로 관조한다면 본래 주관인 능견상과 객관인 경계상의 대립 의존이란 없다. 그런데 지금 실지(實智) 자체인 일심진여를 불각심으로 미혹하여 진여가 무명으로 전변하여 허망한 견해의 모습[능견상]이 되었고 이 때문에 허망한 견해로 보는 모습[경계상]이 있게 되었다. 일심진여가 무명으로 인해 전변한다는 뜻에서 전상이라고 하였다.

 

 

三者(삼자) 境界相(경계상) 以依能見故(이의능견고) 境界妄現(경계망현) 離見則無境界(이견즉무경계)

셋째, 境界相(경계상)이다. 봄 때문에 경계가 헛되이 일어나니, 봄을 떠나면 경계도 없다.

* 元曉 : 경계상이라는 것은 곧 현상(現相)이니 앞의 전상에 의해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能見故 境界妄現이라고 말한 것이다.

* 봄의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12연기의 名과 色이다. 이는 객관이다. 이는 객체 그 자체가 아니라, 주관에 의해 물든 상태로 나타난다. 현상(現相)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六麤(육추)

以有境界緣故(이유경계연고) 復生六種相(부생육종상) 云何爲六(운하위육)

경계상으로 인해서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이 내니,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 세(細)라고 하는 이유는 아리야식이 아주 미세하여 범부와 이승(二乘)으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추(麤)는 그 작용이 거칠어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麤(추) : 거칠다.

* 元曉 : 以有境界緣故 生六種相라고 한 것은 앞의 현식이 나타낸 경계에 의하기 때문에 칠식 가운데 여섯 가지 추상을 일으킨 것이니 이것은 ≪능가경≫에서 말한 “경계의 바람에 의해 움직여서 칠식의 물결이 전전한다.”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

 

一者(일자) 智相(지상) 依於境界(의어경계) 心起分別愛與不愛故(심기분별애여불애고)

첫째, 智相(지상)이니 경계에 따라 마음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의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元曉 : 처음 한 가지 상(智相)은 제 칠식이고, 다음 네 가지는 생기식(生起識)에 있으며, 나 중 한 가지상(業繫苦相)은 저것들이 낸 과보이다. 처음에 지상이라고 한 것은 제 칠식이다. 비로소 혜수(慧數)가 있어서 이것이 아(我)와 진(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지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갖추어 말한다면 본식을 반연하여 아(我)라고 계탁하고 본식이 나타낸 경계를 반연하여 아소(我所)라고 계탁하지만, 이제 이 가운데서는 추상에 의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依於境界 心起라고 하였다. … 이제 칠식은 바로 안으로 향하여 아와 아소를 계탁하지만 마음 밖에 경계가 있음을 계탁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도리어 저 식을 반연한다고 말하였다.

* 지운 : (원효스님의 해설을 빌어) 경계상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지상(智相)으로 나타난다. 지상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며, 자아의식이다. 지상은 아리야식의 업식와 전식을 나라고 생각하고, 경계상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효스님은 경계상을 경계상과 현식으로 나누어 경계상을 떠올리는 것을 현식, 떠올려지는 것을 경계상이라고 보았으며, 지상은 이 현식도 나라고 본다고 하였다. 유식에서는 말나식을 잠재의식이라고 보고 아리야식을 무의식이라고 보지만, 아비달마에서는 합하여 잠재의식이라고 본다.

 

二者(이자) 相續相(상속상) 依於智故(의어지고) 生其苦樂(생기고락) 覺心起念相應不斷故(각심기념상응부단고)

둘째 相續相(상속상)이니 분별지(智相)에 따라 괴롭고 즐거음 내어 각심으로 망념을 일으켜 서로 응하여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 元曉 : 상속상이라는 것은 생기식(生起識)이요 식온(識薀)이다. 이것은 추분별이므로 모든 법을 두루 계탁하여 길이 상속하게 된다. 그리고 능히 애취(愛取)를 일으켜서 과거의 모든 행위를 인지(引持)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며, 윤생(潤生)을 얻게 한다. 이런 뜻으로 상속상이라고 한 것인데 이는 앞서 말한 상속심과는 다르다. 依於智라고 하는 것은 앞의 지상이 바탕이 되어 생기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바는 세상(細相)인지라 오직 사수일 뿐이나 능의(能依 ; 상속상-상속상이 지상에 의지하므로 상속상은 능의이고 지상은 소의이다)는 추상인지라 고락을 함께 일으키니 그 때문에 生其苦樂覺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소의인 지상은 안으로 반연하며 머물며 바깥 경계에는 계탁하지 않으므로 잠자는 것 같지만, 이 상속식은 안팎으로 두루 계탁하여 각관(覺觀)하여 마치 깨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覺心起念고 말한 것이니, 망념을 일으킨다는 것은 곧 법집분별(法執分別)이다.

* 心起念相應不斷故(心起念相應不斷故) : 마음에 망념이 일어나 그 망념들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음. 이는 경계(境界)가 실재라고 생각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三者(삼자) 執取相(집취상) 依於相續(의어상속) 緣念境界(연념경계) 住持苦樂(주지고락) 心起著故(심기착고)

셋째, 執取相(집취상)이니 相續相(상속상)에 의해 경계에 대하여 애착을 일으켜 괴로움과 즐거움에 빠져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위의 상속상에 의해 일으킨 고와 락에 집착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 하는 것(貪)과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 하는 것(瞋)을 모두 포함한다.

* 著(착) : 着과 같음.

* 元曉 : 집취상(執取相)이라는 것은 곧 수온(受蘊)이니 식온에 의해 어기고 따르는 것을 분별하여 고락(苦樂)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依於相續 내지 住持苦樂이라고 한다.

 

四者(사자) 計名字相(계명자상) 依於妄執(의어망집) 分別假名言相故(분별가명언상고)

넷째, 計名字相(계명자상)이니 헛된 집착 때문에 거짓 이름과 말의 상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위의 집취(執取)에 의해 일으킨 것을 진실로 믿고 거기에 시비(是非), 장단(長短), 호오(好惡), 미추(美醜) 등등의 이름을 짓고 분별하는 것.

* 元曉 : 계명자상(計名字相)이라는 것은 곧 상온(想蘊)이니, 앞의 수온에 의해 어기고 따르는 명언(名言)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에 依於妄執 내지 名言相故라고 말한 것이다.

 

五者(오자) 起業相(기업상) 依於名字(의어명자) 尋名取著(심명취착) 造種種業故(조종종업고)

다섯째, 起業相(기업상)이니 이름과 글자 때문에 이름을 찾아 집착하고 갖가지 업을 만들기 때문이다.

* 위의 계명자상(計名字相)에서 지어진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한정시켜 행위를 하는 것. 그래서 업을 일으킴.

* 元曉 : 기업상(起業相)은 곧 行蘊이니 상온이 취한 바의 명상(名相)에 의해 사수(思數)를 일으켜 선과 악을 만들기 때문에 依於名字 내지 造種種業故라고 말한 것이다.

 

六者(육자) 業繫苦相(업계고상) 依於業受報(의어업수보) 不自在故(부자재고)

여섯째 業繫苦相(업계고상)이니 업 때문에 고(苦)를 받아 자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위의 기업상(起業相)에서 일으킨 행위 때문에 마음과 몸이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한 것.

* 繫(계) : 매다.

* 元曉 : 업계고상(業繫苦相)이라는 것은 앞의 행온이 만든 업에 의해 삼유(三有 : 三界)와 육취(六趣)의 고통의 과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依業受報 不自在故라고 한 것이다.

 

當知(당지) 無明能生一切染法(무명능생일체염법) 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이일체염법개시불각상고)

마땅히 알아야 하니, 무명은 능히 모든 염법을 내니, 모든 염법이 모두 不覺相(불각상)이기 때문이다.

* 不覺

不覺

根本 不覺

枝末 不覺

無明業相

무명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함

아리야식

能見相

인식 작용이 있게 됨.

境界相

인식 작용 때문에 경계가 있음.

智相

애증, 염정, 선악의 분별

말나식

相續相

분별지에 따라 괴롭고 즐거운 느낌이 상속

執取相

경계에 애착을 일으킴.

計名字相

개념이나 관념을 만들어 분별함.

起業相

계명자상에 의해 의미부여, 한정시켜 행위

業繫苦相

업 때문에 제한이 있고 고를 받음.

 

 

  • 覺(각)과 不覺(불각)의 同相(동상)과 異相(이상)

復次覺與不覺(부차각여불각) 有二種相(유이종상)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同相(일자동상) 二者異相(이자이상)

또 다시 각(覺)과 불각(不覺)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첫째 同相(동상)이고 둘째 異相(이상)이다.

 

 

    - 同相(동상)

同相者(동상자) 譬如種種瓦器(비여종종와기) 皆同微塵性相(개동미진성상)

同相(동상)이란 것은 비유하면 갖가지 질그릇이 모두 같이 먼지로 되어 있는 것과 같다.

* 질그릇은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먼지(가루)로 만들어진다.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種種業幻(종종업환) 皆同眞如性相(개동진여성상)

이처럼 無漏(무루)와 無明(무명)의 갖가지 業幻(업환)이 다 같이 진여성의 모습이다.

* 원효 : 무루(無漏)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여러 각(覺)을 말하며, 무명(無明)은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의 불각(不覺)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업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業幻이라고 말한 것이다.

 

是故修多羅中(시고수다라중) 依於此義說(의어차의설) 一切衆生(일체중생) 本來常住(본래상주) 入於涅槃(입어열반)

그러므로 경에서 이 뜻에 따라 말하되, “일체 중생이 본래 늘 머물러 있어 열반에 들어 있으며

 

菩提之法(보리지법) 非可修相(비가수상) 非可作相(비가작상) 畢竟無得(필경무득) 亦無色相可見(역무색상가견) 而有見色相者(이유견색상자) 唯是隨染業幻所作(유시수염업환소작) 非是智色不空之性(비시지색불공지성) 以智相無可見故(이지상무가견고)

진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며, 필경은 얻음이 없다. 또한 볼 수 있는 색상이 없는데도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물듦에 따른 業幻(업환)이 지은 것이지, 이것이 지색(智色) 불공(不空)의 성품이 아니니, 智相(지상)은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 원효 : 本來常住 入於涅槃 菩提之法이라고 한 것은 ≪대품경≫에서 “이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끊고, 무여열반에 들어가며, 본래 이것은 세속법이지 제일의제는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공 가운데는 멸함이 없고, 또한 멸하게 하는 것도 없으니, 모든 법이 결국 공한 것이며, 곧 이는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어떤 뜻이 보리인가? 공의 뜻이 보리의 뜻이며, 여(如)의 뜻과 법성의 뜻과 실제의 뜻이 보리의 뜻이며, 또한 모든 법의 실상이 거짓되지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 이것이 보리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非可修相이란 것은 인행(因行)이 없기 때문이고, 非可作相이란 것은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畢竟無得이란 것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얻을 때도 없고 얻을 곳도 없기 때문이다.

* 覺이나 不覺이나 진여를 본성으로 한다. 모든 그릇이 가루로 만들어져 있듯이, 갖가지 상을 띠지만 모두가 진여가 작용한 모습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 열반에 상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진여는 본래 공성이므로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다. 망념만 여의면 바로 진여가 드러난다. 드러난다고 하지만 드러날 만한 것은 없다.

* 《金剛經》 <無得無說分>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수보리가 말하였다.“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할 것 같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으며, 또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습니다.”

* 《維摩經》에도 “일체 중생의 무명 불각의 모습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열반의 모습이므로 증득했다고 해서 새삼스레 무명이 사라지진 않는다.”하였다.

 

 

   - 異相(이상)

異相者(이상자) 如種種瓦器(여종종와기) 各各不同(각각부동)

異相(이상)이라는 것은 갖가지 질그릇이 같지 않음과 같으니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性染幻差別故(성염환차별고)

이처럼 무루와 무명이 染幻(염환)의 差別(차별)을 따르고 染幻(염환)의 差別(차별)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 각(覺)은 남아 있는 染의 정도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

* 性染幻差別(성염환차별) : 불각(不覺)은 무명이 본래 평등성을 어긴 것이므로 차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