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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 해석분 - 훈습 - 정법훈습

서원365 2013. 9. 14. 09:24

 ○ 淨法熏習(정법훈습)

云何熏習(운하훈습) 起淨法不斷(기정법부단)

어떻게 훈습하여 淨法(정법)을 일으켜 단절되지 않는가?

 

所謂以有眞如法故(소위이유진여법고) 能熏習無明(능훈습무명)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능히 무명을 훈습한다.

*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을 본훈(本熏)이라고 한다.

 

以熏習因緣力故(이훈습인연력고) 則令妄心厭生死苦(즉령망심염생사고) 樂求涅槃(요구열반)

훈습한 인연의 힘에 의해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를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한다.

* 중생이 생사고에 빠져 있되, 진여가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생사고를 싫어하여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욕망에 묻혀 살다가도 자주 자기 생활을 회의하고 참다운 길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여훈습 때문이다.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이차망심유염구인연고) 卽熏習眞如(즉훈습진여) 自信己性(자신기성) 知心妄動無前境界(지심망동무전경계) 修遠離法(수원리법)

이 망심으로서 싫어하고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 성품을 믿어, 마음이 헛되게 움직이지만 앞에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 元曉 :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自信己性이라는 것은 십신위 중의 신(信)을 밝힌 것이다. 知心妄動無前境界 修遠離法이라 한 것은 삼현위 중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다. (三賢 : 십주, 십행, 십회향)

* 憨山 : 여기에서는 진여가 안으로 무명을 훈습하여 발심수행하고 진여정업을 이루게 함을 밝혔다. 이는 본훈(本熏)이다. 바로 이 본훈의 작용인 정인(淨因)이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여 정업의 세력을 더욱 증가하게 하는데 이를 신훈(新熏)이라고 한다.

 

以如實知無前境界故(이여실지무전경계고) 種種方便起隨順行(종종방편기수순행) 不取不念(불취불념) 乃至久遠熏習力故(내지구원훈습력고) 無明則滅(무명즉멸)

앞에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을 수순의 행을 일으켜 취하지도 않고 망념을 내지도 않으며 오랜 훈습의 힘 때문에 무명이 사라진다.

 

以無明滅故(이무명멸고) 心無有起(심무유기) 以無起故(이무기고) 境界隨滅(경계수멸) 以因緣俱滅故(이인연구멸고) 心相皆盡(심상개진) 名得涅槃成自然業(명득열반성자연업)

무명이 사라졌으므로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지 않으므로 경계가 따라서 사라지며, 인과 연이 함께 사라지므로 心相(심상)이 모두 다하니, 열반을 얻고 자연업을 이룬다고 한다.

* 自然業(자연업) : 진여의 마음이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 일으키는 자연스런 행위. 곧 부처의 행위이다.

* 元曉 : 以如實知無前境界故라는 것은 초지의 견도(見道)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짐을 밝힌 것이다. 種種方便起隨順行 ~ 久遠熏習力故라는 것은 십지의 수도위 중에서 만행(萬行)을 닦음을 나타낸 것이다. 無明則滅이하는 다섯 번째 과지에서 열반을 증득함을 나타낸 것이다.

* 憨山 : 생멸하는 업식의 망심이 진여를 요동시킴을 아는 수행지가 십해위(十解位)이다. 십해를 의지하여 이를 멀리 여의는 수행이 십행(十行)이며, 십해를 의지하여 십행을 성취하고 유식과 심사(尋伺) 등의 추상적으로 비교해서 관찰하는 비량관을 닦아 진여의 실체를 여실하게 알면 십지의 초지에 이른다. 초지에서 여실한 진여의 이치를 보고 갖가지 방편도로써 진여에 수순하여 수행을 일으키면서 십지수행위 가운데서 모든 수행을 광대하게 닦는다.

 

 

    妄心熏習(망심훈습)

妄心熏習義有二種(망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妄心熏習(망심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 妄心熏習(妄心熏習) : 진여가 망심을 훈습함. 위에 망심훈습이 나왔는데, 앞의 것은 망심이 진여를 훈습하는 것이었다.

 

一者(일자) 分別事識熏習(분별사식훈습) 依諸凡夫二乘人等(의제범부이승인등) 厭生死苦(염생사고) 隨力所能(수력소능) 以漸趣向無上道故(이점취향무상도고)

첫째, 分別事識熏習(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二乘(이승)의 사람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함에 의해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점차 無上(무상)의 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 元曉 : 分別事識熏習이란 것은 경계가 식(識)의 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모르고, 경계가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분별사식이라고 하며, 범부와 이승(二乘)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 지운 :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일곱 가지가 있다. 시.청.후.미.촉의 다섯 감각, 의식, 말라식이다. 이중 가장 강렬한 것이 의식이다. 오각은 경계를 인식할 뿐이고, 말나식은 미세하여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의식을 경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 진여가 의식을 훈습하여 생사를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니 이를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이승의 경지이다.

의식의 특징 : a.자유롭다. 생각의 대상에 한계가 없음. b. 유무형을 다 대상으로 함. c. 오구의식 즉, 다섯 감수 작용과 함께 작용. d. 형상 작용. e. 직관과 추리를 다 할 수 있음.

의식이 지혜로 바뀌면 묘관찰지가 된다.

 

二者(이자) 意熏習(의훈습)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위제보살발심용맹속취열반고)

둘째, 意熏習(의훈습)이니 모든 보살이 마음을 내어 용맹하게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 元曉 : 意熏習이란 업식훈습이라고도 한다. 통틀어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식(識:業識, 轉識, 現識, 知識, 相續識)을 모두 의(意)라 이름 하니, 그 뜻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근본 쪽으로 말한다면 다만 업식만을 취한다. 업식은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중에서 업식을 의(意)라 하며, 이러한 업식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아직 나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일 뿐 따로 경계가 없음을 알며 모든 법은 오직 식(識)의 헤아림인 줄 알아서, 앞의 경계가 밖에 있다는 집착을 버리고 업식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업식훈습이라 이름하며 또한 의훈습이라 이름 한다. 무명에서 일어난 업식이 바로 발심하여 모든 행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眞如熏習(진여훈습)

眞如熏習義有二種(진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眞如熏習(진여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自體相熏習(일자자체상훈습) 二者用熏習(이자용훈습)

첫째 自體相熏習(자체상훈습)이며, 둘째 用熏習(용훈습)이다.

 

自體相熏習者(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종무시세래구무루법) 備有不思議業(비유불사의업) 作境界之性(작경계지성)

自體相熏習(자체상훈습)이라는 것은 시작도 없는 세상부터 無漏法 (무루법)을 갖추고, 불가사의한 업을 갖추어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

* 지운 : 無漏(무루)란 새어나감이 없다는 뜻인데, 부동(不動), 공(空)을 말한다. 번뇌가 없음을 말한다.[공] 이것은 가만히 있지만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작용을 한다. 무루법을 갖추고 생각할 수 없는 진여의 작용을 준비하여[不空], 경계를 만드는 성품이다[空].

* 元曉 :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이라 한 것은 본각 불공의 문에 있는 것이다. 作境界之性이라 한 것은 여실공문의 경계에서 나아가 말한 것이니, 이러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경지(境智)의 힘에 의하여 암암리에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 고순호 :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 진여는 본래 무루법과 부사의한 업용을 갖추고 있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시각(始覺)의 관지(觀智)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여실불공], 그 관지의 대경이 되는 본각(本覺)의 성품까지 된다.[여실공]

* 憨山 : 진여 자체를 말한다면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원래 갖추고 있는 본각무루의 법성인데, 이는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정인불성(正因佛性)인 것이다. 이것이 진여의 본체인데도 자체상이라고 하여 상(相)이라고 한 것은 자체에 상즉한 그 자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실공한 진여의 자체에 갖춘 여실불공한 정무루공덕의 모습이다. 이는 이른바 항하사와 같은 본성에 걸맞은 공덕에 해당한다. 備有不思議業이란 것은 이 자체에 상즉한 진여의 공덕상에 불가사의한 업지의 작용을 빠짐없이 지니고 있어 외부의 세계 있어서는 무정과 함께 경계의 근본[性]이 된다.

* 무루법이란 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무루(無漏)란 새어 나감이 없다는 뜻으로 불생불멸을 말하며, 불변(不變)을 말하며, 번뇌나 일체의 상이 없음을 말한다. 不思議業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불공(不空)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진여가 갖추고 있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 진여를 체득했을 때는 고요하지만, 체득하지 못했을 때는 체득하도록 스스로 영향을 주어 깨달음에로 나아가게 한다. 이때 깨달음에로 나아가려는 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는 것은 시각이 본각을 목표로 하되 그 본성이 공함을 말한다.

 

依此二義(의차이의) 恒常熏習(항상훈습) 以有力故(이유력고) 能令衆生(능령중생)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自信己身有眞如法(자신기신유진여법) 發心修行(발심수행)

이 두 가지 뜻에 의해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며,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법이 있음을 믿어 마음을 내어 수행하게 한다.

 

 

問曰(문왈) 若如是義者(야여시의자) 一切衆生悉有眞如(일체중생실유진여) 等皆熏習(등개훈습) 云何有信無信(운하유신무신) 無量前後差別(무량전후차별)

문 : 만약 이 뜻과 같다면, 모든 중생이 다 진여가 있을 것이며, 다 같이 훈습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한량없는 전후 차별이 있는가?

 

皆應一時(개응일시) 自知有眞如法(자지유진여법) 勤修方便(근수방편) 等入涅槃(등입열반)

마땅히 다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 부지런히 방편을 수행해서 같이 열반에 들어야 할 것이다.

* 無量前後差別(무량전후차별) ; 진여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믿는 데 시간적으로 엄청난 전후의 차이가 있음.

 

 

答曰(답왈) 眞如本一(진여본일) 而有無量無邊無明(이유무량무변무명)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性差別(자성차별) 厚薄不同故(후박불동고)

답 :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한량없고 가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에 차별이 있어 두텁고 얇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 自性差別(자성차별) 厚薄不同故(후박불동고) : 자성이 차별이 있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진여성품이 차별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무명에 물든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진여성품은 누구나 같다.

 

過恒沙等上煩惱(과항사등상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갠지스 강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가 무명 때문에 차별이 일어나며,

 

我見愛染煩惱(아견애염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依於無明所起(의어무명소기) 前後無量差別(전후무량차별) 唯如來能知故(유여래능지고)

我見(아견)과 我愛(아애)의 물든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키니, 이처럼 일체의 번뇌는 무영에 의지하여 일어나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일어나는데,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元曉 : 상번뇌(上煩惱)는 알아야 할 진리를 알지 못해 보리를 장애하는 소지장(所知障)이며, 아견애(我見愛)의 염번뇌는 열반을 장애하는 번뇌장(煩惱障)이다.

 

又諸佛法(우제불법) 有因有緣(유인유연) 因緣具足(인연구족) 乃得成辦(내득성판)

그리고 모든 불법은 因(인)이 있고, 緣(연)이 있으니, 인연이 모두 구족하여야 갖출 수 있으니,

* 有因有緣(유인유연) : 인(因)은 진여에 의한 훈습이다. 연(緣)은 선지식을 만남이다.

 

如木中火性(여목중화성) 是火正因(시화정인) 若無人知(야무인지) 不假方便(불가방편) 能自燒木(능자소목) 無有是處(무유시처)

나무 가운데 불의 성품이 있어서 이것이 불의 正因(정인)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능히 저절로 나무를 태운다는 것이 옳다고 인정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衆生亦爾(중생역이) 雖有正因熏習之力(수유정인훈습지력)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야불우제불보살선지식등) 以之爲緣(이지위연)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능자단번뇌입열반자) 則無有是處(즉무유시처)

중생도 그와 같아서, 비록 正因(정인)이 훈습하는 힘이 있더라도,

 

만약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나서 그 인연을 삼지 않으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이 옳다고 인정될 곳이 없다.

 

若雖有外緣之力(야수유외연지력) 而內淨法(이내정법) 未有熏習力者(미유훈습력자) 亦不能究竟(역불능구경)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만약 비록 밖으로의 緣(연)이 있다고 해도 안으로 정법이 훈습하는 힘이 없다면, 또한 마침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若因緣具足者(약인연구족자) 所謂自有熏習之力(소위자유훈습지력)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우위제불보살등자비원호고)

만약 因(인)과 緣(연)이 구족한 사람이라면, 이른 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모든 부처와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보호함이 되기 때문에,

 

能起厭苦之心(능기염고지심) 信有涅槃(신유열반) 修習善根(수습선근) 以修善根成熟故(이수선근성숙고)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즉치제불보살시교리희) 乃能進趣向涅槃道(내능진취향열반도)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고, 열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선근을 닦아 익혀, 선근을 닦음이 성숙한 까닭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이익과 기쁨을 만나, 이에 열반도로 나아갈 수 있다.

* 위에서 진여가 동일한데 왜 믿고 안 믿는 차이나, 열반에 들어가는 차이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 답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무명이 두터움과 엷음이다. 둘째는 내적으로 일어나는 진여훈습의 차이이다. 셋째 외적으로 불보살의 가르침을 만나는 차이이다.

 

 

用熏習者(용훈습자) 卽是衆生外緣之力(즉시중생외연지력) 如是外緣(여시외연) 有無量義(유무량의) 略說二種(략설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用熏習(용훈습)이라는 것은 바로 중생의 外緣(외연)의 힘이니, 이와 같은 외연은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이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 用熏習(용훈습) : 자체상훈습은 누구나 갖추고 있는 진여성이 정인(正因)이 되어 훈습하는 것이며, 내부적인 훈습이지만, 용훈습은 수행에 마음을 낸 중생을 불보살 등이 외부에서 돕는 훈습이다.[外緣]

 

一者差別緣(일자차별연) 二者平等緣(이자평등연)

첫째는 差別緣(차별연)이고 둘째는 平等緣(평등연)이다.

 

 

差別緣者(차별연자) 此人依於諸佛菩薩等(차인의어제불보살등) 從初發意始求道時(종초발의시구도시) 乃至得佛(내지득불)

差別緣(차별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모든 불보살들에 의지하여 처음 뜻을 내어 求道(구도)를 시작할 때부터 성불할 때까지,

 

於中若見若念(어중약견약념) 或爲眷屬父母諸親(혹위권속부모제친) 或爲給使(혹위급사) 或爲知友(혹위지우) 或爲怨家(혹위원가) 或起四攝(혹기사섭)

그러는 중에, 보거나 생각하면 眷屬(권속)과 부모와 여러 친족이 되기도 하고, 혹 給使(급사)가 되기도 하며, 혹 친구가 되기도 하고, 혹 원수의 집이 되기도 하고, 혹 四攝(사섭)을 일으키기도 한다.

* 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어중약견약념 혹위권속부모제친) : “수행을 하는 사람이 불보살을 보거나 생각하면 불보살이 권속, 부모, 친족이 되어….” 뒤의 부분도 이와 같이 해석하면 된다. 이는 수행자에 맞게 연(緣)이 되어준다는 말이다. 바로 차별연의 예를 든 것이다. 범부와 이승이 분별사식에 따라 보므로 이들의 정도에 맞추어 외연이 되어주기 때문에 이런 차별이 일어나는 것이다. 《法華經》<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사부대중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사부대중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해준다. 장자와 거사, 재상, 관리, 바라문의 부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부인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하고, 동남동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동남동녀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해준다.…”

* 四攝(사섭) :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 실질적으로 이익을 줌), 동사(同事 : 중생들과 함께 하며 교화함)

* 元曉 : 差別緣이란 것은 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위해 연을 짓는 것이니, 연을 짓는 자는 십신이상에서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연을 짓게 된다. 平等緣이란 것은 모든 보살의 업식 훈습을 위해 연을 짓는 것이니, 초지이상에서 모든 부처에 이르기 까지 동체지력(同體智力)에 의하여야 바야흐로 평등연을 짓기 때문이다.

* 憨山 : 분별사식은 훈습을 따라서 발심한 범부와 소승인의 종류를 따라서 갖가지 응화신을 나타내는 것을 차별연이라고 하며, 근본업식의 훈습을 따라 발심한 대승보살이라면 승응신(勝應身)을 나타내어 평등하게 감응해 주는 것을 평등연이라고 한다.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내지일체소작무량행연) 以起大悲熏習之力(이기대비훈습지력) 能令衆生增長善根(능령중생증장선근) 若見若聞得利益故(약견약문득리익고)

나아가 짓는 모든 한량없는 행위의 연이 되니, 大悲(대비)의 훈습의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혹 보기도 하고 혹 듣기도 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 憨山 : 제불보살이 중생을 위해 성취하는 외연은 망상의 의식적 조작이 없는 무작대비(無作大悲)로 훈습하는 세력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 삼신(三身) 가운데 응화신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작용해주는 차별연을 말하였다.

 

此緣有二種(차연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외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近緣(일자근연) 速得度故(속득도고) 二者遠緣(이자원연) 久遠得度故(구원득도고) 是近遠二緣分別(시근원이연분별)

첫째는 近緣(근연)이니 빨리 得度(득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遠緣(원연)이니 오래 걸려 得度(득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외연의 분별이다.

* 得度(득도) : 度는 도(渡)와 뜻이 같다. 건넘이라는 뜻. 즉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감이다. 차안은 번뇌의 세계이며 피안은 열반의 세계이다.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增長行緣(일자증장행연) 二者受道緣(이자수도연)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增長行緣(증장행연)이고, 둘째는 受道緣(수도연)이다.

* 元曉 : 增長行緣이란 것은 보시, 지계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受道緣이란 것은 문·사·수(聞思修)를 들어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平等緣者(평등연자) 一切諸佛菩薩(일체제불보살) 皆願度脫一切衆生(개원도탈일체중생) 自然熏習恒常不捨(자연훈습항상불사)

平等緣(평등연)이라는 것은 모든 불보살이 다 모든 중생을 해탈하기를 바라서, 저절로 훈습하고 항상 버리지 않으며

 

以同體智力故(이동체지력고) 隨應見聞(수응견문) 而現作業(이현작업) 所謂衆生依於三昧(소위중생의어삼매) 乃得平等見諸佛故(내득평등견제불고)

同體智(동체지)의 힘으로 보고 들음에 따라 업을 지음을 나타내니, 이른 바 중생이 삼매에 의지하여 똑 같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서로 차별이 나는 중생들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지, 불보살은 모든 중생이 똑 같이 제도되도록 무작대비(無作大悲)로 훈습하므로 평등하다. 《법화경》약초유품에 “삼천 대천 세계의 모든 식물들에게 짙은 구름이 가득 퍼져 비를 뿌리면 모든 식물들은 제각기 비를 맞으며, 그 초목의 성질에 맞게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였다.

* 隨應見聞(수응견문) : 중생의 보고 들음에 따라서.

* 지운 - 주객관이 나뉘어 있는 사람에게는 외연들을 차별로 보지만, 주객관이 나뉘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외연들이 모두 진여의 작용임을 안다.

진여훈습:

정법훈습

妄心熏習

分別事識熏習

진여가 의식을 훈습, 厭生死苦 求涅槃

意(業識)熏習

진여가 업식을 훈습,

眞如熏習

自體相熏習

진여자체가 具無漏法 備不思議業 作境界之性, 정법훈습의 내적원인 [正因]

用熏習

밖으로부터 불보살이 정법훈습이 되도록 돕는 것[外緣]

수행자를 둘러싼 외연이 다름

近緣 : 速得度 - 정진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짐

遠緣 : 久遠得度

增長行緣 : 육바라밀을 증장함.

受道緣 : 聞, 思, 修

平等緣

다른 외연이 모두 불보살(진여)의 작용임.

 

 

此體用熏習分別(차체용훈습분별)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體(체)와 用(용)훈습의 분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일자) 未相應(미상응)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위범부이승초발의보살등) 以意意識熏習(이의의식훈습) 依信力故而能修行(의신력고이능수행)

첫째 상응하지 못함이니, 범부와 二乘(이승), 처음 마음을 낸 보살들이 意와 意識의 훈습으로써 믿는 힘에 의지하여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미득무분별심여체상응고) 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미득자재업수행여용상응고)

무분별심과 體(체)가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재한 업을 얻지 못하여 수행과 用(용)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與體相應(여체상응) 수행자의 지(智)와 진여의 체(體)가 아직 서로 응함을 말하니, 무분별지를 얻지 못하면 상응하지 못한다. 與用相應(여용상응) : 용(用)은 용 훈습으로서 진여의 작용이며, 이를 응신이라고 한다. 자재업을 얻지 못하여 부처의 응신과 상응하지 못함을 미상응(未相應)이라고 한다. 팔지 이상이 되어야 상응할 수 있다.

* 元曉 : 以意意識熏習(이의의식훈습) - 의식훈습은 범부와 이승의 훈습이며 분별사식훈습이다. 의훈습은 초발심보살 이상의 훈습이며, 업식훈습이다. (별기) - 법신보살이 법신을 증득할 때 능견상을 여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지전(地前 : 십지이전)의 보살을 의훈습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속지(俗智)로 보불(報佛)을 보는 뜻에 의한다면 금강심(金剛心:제10지의 滿心) 이하에서 모두 견상(見相)이 있음을 통틀어 업식훈습이라고 한다.

 

 

二者(이자) 已相應(이상응) 謂法身菩薩(위법신보살) 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득무분별심여제불지용상응)

둘째 이미 상응함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심과 佛智(불지)의 用(용)이 상응함을 말한다.

 

唯依法力(유의법력) 自然修行(자연수행) 熏習眞如(훈습진여) 滅無明故(멸무명고)

오직 법력에 의지하여 저절로 수행하고,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없애기 때문이다.

* 이는 십지보살의 훈습이며, 진여의 근본지와 수행으로 얻은 지(智)가 서로 상응하는 단계임.

* 元曉 : 이상응(已相應) 중에 법신보살이란 십지보살이요, 得無分別心(득무분별심)은 체와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與諸佛智用相應은 여량지(如量智)가 있기 때문이며, 自然修行은 팔지 이상에서 공용(功用 : 애써 노력함)이 없기 때문이다.

* 憨山 : 십지 이상의 보살은 무분별심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진여의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으로 서로 호응할 수 있다. 법신보살은 진여법으로 훈습하는 세력만을 의지하여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임의로 운행하여 정진수행하기 때문에 진여법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서로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 초지에서 칠지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으므로 진여 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팔지(八地) 이후 무상관을 닦을 땐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호응하며, 이승인과 삼현보살은 육식(六識)에 의지하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를 비교하여 추리로 관찰하기 때문에 자체와 작용 어느 쪽에도 호응하지 못한다.

* 지운 : 분별심이란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이다. 초지에 이르면 주객이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진여를 조금씩 보게 되고, 8지에 이르면 상응하게 된다. 7지까지는 수행을 하다가 퇴보할 수도 있지만, 8지부터는 퇴전하는 일이 없다. 8지는 객관이 타파되는 단계이고, 9지는 주관이, 10지는 업식이 타파되는 단계이다.

 

 

   • 染法․淨法(염법정법)의 斷․不斷(단부단)

復次染法(부차염법) 從無始已來(종무시이래) 熏習不斷(훈습부단) 乃至得佛後則有斷(내지득불후즉유단)

다시 다음에 염법은 無始(무시)이래로 훈습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깨달은 뒤에야 끊어짐이 있다.

 

淨法熏習(정법훈습) 則無有斷(즉무유단) 盡於未來(진어미래) 此義云何(차의운하)

淨法(정법) 훈습은 끊어짐이 있지 않으니, 미래로 다하니 이 뜻이 어떠한가?

 

以眞如法常熏習故(이진여법상훈습고) 妄心則滅(망심즉멸) 法身顯現(법신현현) 起用熏習故無有斷(기용훈습고무유단)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멸하고 법신이 나타나 用熏習(용훈습)을 일으키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

* 염법은 무시이래로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오지만 결국은 끊어진다. 그러나 정법은 무시이래로 이어져 미래에도 다함이 없다. 그것은 불생불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