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이야기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 해석분 - 분별발취도상 - 증발심

서원365 2013. 10. 1. 10:08

 (4) 證發心(증발심)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證發心者(증발심자) 從淨心地(종정심지)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證何境界(증하경계)

證發心(증발심)이라는 것이 淨心地(정심지)부터 나아가 보살의 究竟地(구경지)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할까?

* 淨心地(정심지) : 보살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를 말함.

* 究竟地(구경지) : 보살 십지 중 제 십지인 법운지(法雲地)를 말함.

 

所謂眞如(소위진여) 以依轉識(이의전식) 說爲境界(설위경계) 而此證者(이차증자) 無有境界(무유경계) 唯眞如智(유진여지) 名爲法身(명위법신)

이른바 진여이니, 전식에 의지하여 설명하므로 경계라고 하나, 이것을 증득한 사람은 경계가 있지 않고 오직 진여의 지혜뿐이라 이름을 법신이라고 한다.

* 元曉 : 以依轉識 說爲境界란 것은 전식의 상은 능견의 작용이어서, 이 능견에 대하여 경계라고 말한 것이니, 이러한 제지(諸地)에서 일어난 증지(證智)는 전식에 의해서만 증득하기 때문이다. 능견의 소의(所依)에 대하여 임시로 경계라고 말하나 바로 증지에 나아가서는 곧 能과 所가 없기 때문에 而此證者 無有境界라고 말한 것이다.

* 憨山 : 근본 실지로 진여의 이치를 반연하면 실지인 주관과 진여인 객관의 차별적인 모습이 없다. 실지인 마음과 진여 경계가 일여(一如)다. 그런데 以依轉識 說爲境界라 함은 전식 뒤에서 진여의 이치를 반연하여 진여변상(眞如變相)인 현상의 경계를 통해서 진여성공의 이치를 관찰하므로 이는 관찰하는 주관과 관찰한 객관인 진여가 상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때문에 관찰할 진여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있게 된다. 진여를 증득함은 이런 경계가 아님을 구별해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증득한 진여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성을 여의어 진여의 이치와 근본실지가 절대 홀로 존재한다. 그 때문에 증오할 대상인 진여의 경계가 따로 없고 유일한 진여지(眞如智)일 뿐임을 법신이라고 명칭한다.

* 전식(轉識)으로 인해 경계를 나타내어, 경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전식으로 설명하니 진여 경계라고 할 뿐, 진여 그 자체는 아무런 경계가 없이 진여의 지혜만 있을 뿐이다. 경계상은 전식이 있어야 일어난다. 부처의 경지를 대상화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은 전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불지에 든다면 주객과 개관의 나뉨이 없어 경계라는 것이 없다.

 

是菩薩於一念頃(시보살어일념경) 能至十方無餘世界(능지시방무여세계) 供養諸佛請轉法輪(공양제불청전법륜)

이 보살은 한 생각 중에도 능히 시방의 남김 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고 법륜을 굴릴 것을 청한다.

* 憨山 : 진여를 정면으로 증오(證悟)했다면 시방법계의 평등한 일법계의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 목전에 있는 듯하여 자타의 신상(身相)이 마치 거울과 거울의 광채가 서로 장애함이 없이 하나로 교차하듯 한다. 그 때문에 일념의 제망찰토(帝網刹土)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설법해주기를 청한다. 일체 중생이 진여의 이치로 평등하여 자타의 두 모습이 없음을 본다. 그 때문에 일체 중생에게 이익을 줄 뿐이다.

 

唯爲開導利益衆生(유위개도리익중생) 不依文字(불의문자) 或示超地速成正覺(혹시초지속성정각) 以爲怯弱衆生故(이위겁약중생고)

오직 중생을 이끌어 이롭게 하기 위할 뿐, 문자에 의지하지 않으며, 경지를 초월하여 정각을 속히 이룸을 보이기도 하니, 이는 겁이 많고 약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說我於無量阿僧祇劫(설아어무량아승기겁) 當成佛道(당성불도) 以爲懈慢衆生故(이위해만중생고)

나는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성불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니,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다.

* 보살의 종성과 근기가 같으나 중생들을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보임을 설명하였다. 엄청난 시간이 걸림을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발심하지 않는 중생을 위하여 경지를 초월하여 속히 이룸을 보여주기도 하고, 교만하고 게으른 중생을 위해서는 한량없는 시간이 지나야 성불하게 된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能示如是無數方便(능시여시무수방편) 不可思議(불가사의) 而實菩薩種性根等(이실보살종성근등) 發心則等(발심즉등) 所證亦等(소증역등)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보이는 것이 불가사의하나, 실제로는 보살의 종성과 근기가 같으며, 증득함도 또한 같아서

 

無有超過之法(무유초과지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이일체보살개경삼아승기겁고)

이에 지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삼 아승기겁을 지났기 때문이다.

* 증득하여 발심하는 보살에 대한 설명이다. 種性根等(종성근등;종성과 근기가 같음)이라 한 것은 성불할 근기가 같다는 말이다. 發心則等(발심즉등;발심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성불하려는 발심을 하기 때문이다. 所證亦等(소증역등;증득한 것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경계와 주관이 없음을 증득하였음을 말한다. 無有超過之法(무유초과지법;이를 넘어서는 법이 없음)은 보살들을 뛰어넘는 법이 없음을 말한다.

 

但隨衆生世界不同(단수중생세계부동) 所見所聞(소견소문) 根欲性異故(근욕성리고) 示所行亦有差別(시소행역유차별)

다만 중생의 세계가 같이 않고 보는 바와 듣는 바, 근기와 바라는 바, 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에 또한 차별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② 發心相(발심상)과 功德相(공덕상)

又是菩薩發心相者(우시보살발심상자) 有三種心微細之相(유삼종심미세지상) 云何爲三(운하위삼)

또 이 보살이 마음을 낸 모습에는 세 가지의 미세한 모습이 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一者眞心(일자진심) 無分別故(무분별고) 二者方便心(이자방편심) 自然遍行利益衆生故(자연편행리익중생고) 三者業識心(삼자업식심) 微細起滅故(미세기멸고)

첫째는 진심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방편심이니 저절로 두루 수행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業識心(업식심)이니 미세하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 元曉 : 眞心(진심) - 무분별지(無分別智), 方便心(방편심) - 후득지(後得智), 業識心(업식심) - 두 가지의 지혜에 의거하는 아리야식이니, 사실을 말한다면 또한 전식과 현식이 있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은 근본의 세상(細相)만을 대략 든 것이다. 그러나 이 업식은 발심의 덕이 아니니, 다만 두 가지 지혜가 일어날 때 이러한 미세하게 생멸하는 허물이 있어 불지(佛智)의 순정한 덕과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합해서 발심상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 高淳豪 : 眞心(진심)이라 한 것은 근본지(根本智)를 말하며, 方便心(방편심)은 후득지(後得智)인 권지(權智)를 말하며, 業識心(업식심)은 원효스님은 “무분별지와 방편심에 의지하는 아리야식으로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은 있으나, 삼세(三細) 중에 업식만을 든 것이며, 이것은 법신보살이 발심의 덕은 아니나, 앞의 2지가 일어날 때 아직은 무명업식을 완전히 다하지 아니하여 미세하게 기멸하는 누가 있음을 밝혀 순정의 덕과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고 하였다.

* 지운 : 증발심(證發心)이란 주객이 없는 상태에서 발심하는 것으로, 진심(眞心)은 근본지이고, 방편심(方便心)은 후득지로서 여량지(如量智)라고도 하며, 중생을 보면 제도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업식심(業識心)은 선천적인 것으로 주객미분이지만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말한다.

* 憨山 : 지상(地上)의 법신보살이 권지와 실지의 작용이 있기는 해도 아직은 구경의 극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다. … 眞心無分別故(진심무분별고) - 근본실지. 方便心(방편심) - 방편권지. 業識心(업식심) - 미세하게 생멸하는 심상. 이것은 이 보살이 권지와 실지가 있긴 하나 아직은 근본무명 업식심인 이숙식(異熟識)이 공적하지 못하여 그래도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又是菩薩功德成滿(우시보살공덕성만) 於色究竟處(어색구경처) 示一切世間最高大身(시일체세간최고대신)

또 이 보살은 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색구경처에서 모든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보인다.

 

謂以一念相應慧(위이일념상응혜) 無明頓盡(무명돈진) 名一切種智(명일체종지)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能現十方(능현시방) 利益衆生(이익중생)

이른바 일념이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一切種智(일체종지)라고 하니, 저절로 부사의한 업이 있어서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

* 高淳豪 : 제십지 보살은 색계의 최고인 색구경천에서 성도를 한다고 한다. 이는 보신(報身)으로 가장 큰 몸이 되는데, 자기에게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 되고 남에게는 타수용신(他受用身)이 된다.

* 三身(삼신)을 법신, 보신, 응신으로 나누기도 하고, 자성신, 수용신, 변화신으로 나누기도 한다. a.자성신(自性身) - 저절로 존재하는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b. 수용신(受用神) -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즐기고, 또 그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즐겁게 하는 부처.(자수용신 :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즐기는 부처, 타수용신 : 깨달음의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즐겁게 하는 부처) c. 변화신(變化身)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변화하여 나타나는 부처. ≪시공불교사전≫

이렇게 나눈다면 자성신은 법신, 자수용신은 보신, 나머지는 응신에 해당한다.

* 元曉 : 욕심이 있는 색계와 무색계에서 부처님이 성불한 것이 아니었다네. 색계 중의 높은 하늘 구경천에서 욕심을 떠나갈 때 도를 얻었네.

* 삼계(三界)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 되어 있다. 모든 부처님이 성불한 것은 욕계나 무색계가 아니라 색계의 제일 위 하늘인 색구경천이다. 그 이유는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③ 一切種智(일체종지)

問曰(문왈) 虛空無邊故世界無邊(허공무변고세계무변) 世界無邊故衆生無邊(세계무변고중생무변)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중생무변고심행차별역부무변)

문 : 허공이 가없으므로 세계가 가없고, 세계가 가없으므로 중생이 가없으며, 중생이 가없으므로 심행의 차별도 또한 가없다.

 

如是境界不可分齊(여시경계불가분제) 難知難解(난지난해) 若無明斷(약무명단) 無有心想(무유심상) 云何能了名一切種智(운하능료명일체종지)

이처럼 경계는 한계를 지을 수 없으니 알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만약 무명이 끊어졌다면 心想(심상)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능히 알 수 있기에 일체종지라고 하는가?

* 一切種智(일체종지) : 모든 종류의 경계와 심상을 아는 지혜이다. 그런데 세계도 끝이 없고 중생도 한량없으며, 그 심행도 각각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다 알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금강경》<일체동관분>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모두 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答曰(답왈) 一切境界本來一心(일체경계본래일심) 離於想念(리어상념) 以衆生妄見境界故(이중생망견경계고) 心有分齊(심유분제) 以妄起想念(이망기상념) 不稱法性故(불칭법성고) 不能決了(불능결료)

답 : 모든 경계가 본래 일심이니, 상념을 여의었으나, 중생들은 헛되이 경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계가 있으며 헛되이 상념을 일으켜 法性(법성)에 합치되지 않기에 분명하게 알 수 없다.

* 元曉 : 一切境界本來一心 離於想念이란 것은 도리를 세운 것이다. 모든 경계는 본래 끝이 있지 않지만, 끝이 없지도 않으니, 일심을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끝이 없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니, 이 때문에 상념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이다.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제란 것은 보는 바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諸佛如來(제불여래) 離於見想(리어견상) 無所不遍(무소불편) 心眞實故(심진실고) 卽是諸法之性(즉시제법지성)

모든 부처는 헛된 見想(견상)을 여의어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것이 모든 법의 본성이다.

* 元曉 : 離於見想 無所不遍이란 것은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이란 것은 불심은 망상을 여의어 일심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망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하다고 한 것. 이리하여 불심이 모든 망법의 체이며, 모든 망법은 다 불심의 상인지라 상은 자체를 나타내고 자체는 그 상을 비추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체는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춘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다.

 

自體顯照一切妄法(자체현조일체망법) 有大智用(유대지용) 無量方便(무량방편) 隨諸衆生所應得解(수제중생소응득해) 皆能開示種種法義(개능개시종종법의) 是故得名一切種智(시고득명일체종지)

자체가 모든 헛된 법을 나타내 비추고 大智(대지)의 용이 있으니, 한량없는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이 응하여 이해한 바에 따라서 갖가지 법의 뜻을 열어보여 주니,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한다.

* 진여는 상념이 없는데(眞心無知) 어떻게 한량없는 중생들의 경계를 아는가? 왜냐하면 진여는 여실공과 여실불공의 두 측면이 있어서, 중생의 경계에 상응하여 정념으로 중생들의 경계를 안다.

 

 

  ④ 世間(세간)에서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

又問曰(우문왈) 若諸佛有自然業(약제불유자연업)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능현일체처리익중생자)

문 : 만약 모든 부처가 자연업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내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분이라면,

* 自然業(자연업) : 의도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행위

 

一切衆生(일체중생) 若見其身(약견기신) 若覩神變(약도신변) 若聞其說(약문기설) 無不得利(무부득리) 云何世間多不能見(운하세간다불능견)

모든 중생이 그 몸을 보고 신통변화를 본다면 이익을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어찌하여 세간에서는 보지 못함이 많은가?

 

答曰(답왈) 諸佛如來(제불여래) 法身平等遍一切處(법신평등편일체처) 無有作意故(무유작의고) 而說自然(이설자연)

답 : 모든 부처는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 하여 의도를 지음이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설한다.

 

但依衆生心現(단의중생심현) 衆生心者猶如於鏡(중생심자유여어경)

다만 중생심에 의지하여 나타낼 뿐이니, 중생심이라는 것은 거울과 같다.

 

鏡若有垢色像不現(경약유구색상불현) 如是衆生心(여시중생심) 若有垢法身不現故(약유구법신불현고)

거울에 때가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처럼 중생심도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 憨山 : 여래의 법신 대용인 보신과 화신의 작용은 항상 그러하여 중생의 심의식을 보편하게 관조한다. 그러나 단지 중생의 심의식에 여래의 법신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더러운 때가 끼어 무명의 어둠이 가리어졌을 뿐이다. 그 때문에 보지 못할지언정 그것이 부처님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거울로써 부처님을 뵙고 뵙지 못하는 의미를 비유하였다. 이 문제르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심은 비유한다면 햇빛이 대지를 두루 비추면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보지만, 유독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봉사는 보지 못한다. 봉사가 비록 햇빛을 보지 못한다고는 하나 역시 따스한 햇빛의 혜택을 받는다.”

* 佛身의 법체는 없는 곳이 없어서, 중생이 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늘 볼 수 있다. 무명에 의해 물들어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법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수행되었다는 뜻이니, 본인 역시 부처가 된다. 그러다보면 법신을 여실하게 본다는 것이나 성불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