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논 어

論語集註 學而篇 11, 12, 13, 14, 15, 16

서원365 2016. 12. 15. 19:36

11.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그 뜻을 보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행동을 보나, 삼년 동안 아버지의 道를 고치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

-父在 觀其志(부재 관기지):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그의 뜻(포부. 지향하는 바)을 본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있으므로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아버지가 하던 방법을 아버지 죽자마자 확 뜯어고치는 것은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음이다. 그렇다고 하여 바로 고쳐야 할 나쁜 것까지 그대로 두라는 것은 아니다. 불요불급이면 차차해도 된다는 뜻이며, 아버지가 하던 일이므로 차마 급히 고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父在 子不得自專 而志則可知, 父沒然後 其行可見. 故觀此 足以知其人之善惡. 然又必能三年無改於父之道 乃見其孝. 不然則所行雖善 亦不得爲孝矣.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자식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뜻은 알 수 있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그 행동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관찰하면 충분히 그 사람의 선악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년 동안 아버지가 했던 방법을 고치지 말아야 그의 효성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행한 것이 선하다고 해도 효성스럽다고 할 수 없다.

-其人(기인): 여기서는 아버지를 말함.


*尹氏曰 “如其道 雖終身無改 可也, 如其非道 何待三年? 然則三年無改者 孝子之心 有所不忍故也.”

尹氏가 말했다. “만약 도라면 비록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아도 좋지만, 도가 아니라면 어찌 삼년을 기다릴 것인가? 그렇다면 삼년을 고치지 않는 것은 효자의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


*游氏曰 “三年無改 亦謂在所當改而可以未改者耳.”

游氏(酢)가 말했다. “삼년을 고치지 말라는 것은 또한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 있으나 아직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한다.”


12. 有子曰 “禮之用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

유자가 말했다. “예의 쓰임은 화를 귀히 여기니, 선왕의 道도 이를 아름답게 여겼으며, 작고 큰 것이 그로부터 말미암았다.

-和(화)를 朱子(주자)는 從容而不迫으로 보았다. 화는 한 마디로 조화이다. 오늘날 禮節도 형식적인 측면이 있고 내면적인 측면이 있지만, 고대 중국의 禮는 제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예는 격식이나 형식을 갖추는 것보다는 인간들이 조화롭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규범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법이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예절이 겉치레가 목적이 아니며, 도덕이 僞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다.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이와 같다.


*禮者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也. 和者 從容不迫之意. 蓋禮之爲體雖嚴 然皆出於自然之理, 故其爲用 必從容而不迫 乃爲可貴. 先王之道 此其所以爲美 而小事大事無不由之也.

禮란 天理의 예절에 관한 규정이며, 人事의 儀則(의칙)이다. 和란 종용하고 급박하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대개 禮의 본체 됨은 비록 엄하지만, 모두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으므로 그 씀에는 반드시 종용하고 급박하지 않아야 귀할 만 한 것이다. 선왕의 道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서 작은 일과 큰 일이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천지자연의 운행에는 절(節:때)과 문(文:무늬)이 있다. 節은 대나무의 마디가 나뉘어져 있듯이 자연의 시간(때)이 낮과 밤, 하루, 한 달, 사계절, 24절기 등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뜻하며, 文은 해와 달과 별이 하늘을 무늬 놓음과 사계절의 변화가 땅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행하지 말 것이 있으니, 조화를 알아 조화롭게 하더라도, 예로써 그것을 절제하지 않으면 또한 행하지 말아야 한다.”

-禮가 和를 소중히 여기되 만약 和에만 치우쳐 절제하지 못하면 禮를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조화만 강조하면 男女長幼가 없어지며, 질서가 사라지니, 예가 본래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사라지게 된다.


*承上文而言. 如此而復有所不行者, 以其徒知和之爲貴 而一於和 不復以禮節之, 則亦非復禮之本然矣, 所以流蕩忘反 而亦不可行也.

윗글에 이어서 말하였다. 이와 같지만 다시 행하지 못 할 것이 있으니, 다만 和가 귀함만을 알아서 한결같이 和만 하고 다시 禮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禮의 본연이 아니며, 흐르고 방탕하여 돌아감을 잊으니 또한 행할 수가 없다.

-徒(도):다만 ...뿐

-流蕩忘反(유탕망반): 流는 놀이 등의 흐름에 빠지는 것. 蕩은 방탕한 것.


*程子曰 “禮勝則離. 故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以斯爲美而小大由之. 樂勝則流. 故有所不行者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禮에 너무 치우치면 支離해진다. 그러므로 예를 씀에 和가 귀함이 되니, 선왕의 도가 이로써 귀함을 삼고 작은 일과 큰 일에 그것을 따른 것이다. 樂에 치우치면 방탕한 데로 흐른다. 그러므로 행하지 못할 바가 있다는 것은 和를 알아서 和하기만 해서 禮로써 절제하지 않으니, 또한 행할 수 없다.”


*范氏曰 “凡禮之體 主於敬而其用則以和爲貴, 敬者 禮之所以立也, 和者 樂之所由生也. 若有子 可謂達禮樂之本矣.

范氏(祖禹)가 말하였다. “모든 例의 體는 敬을 주로 하고, 그 用은 和를 귀하게 여기니, 敬은 體가 확립된 것이요, 和는 樂이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有子로 말하면 禮와 樂의 근본에 통달했다고 할 수 있다.“

-范祖禹(범조우:1041~1098)字는 淳夫(또는 淳父、純父、純甫)또는 夢得,成都府華陽縣 사람이다.


*愚謂 嚴而泰 和而節 此理之自然, 禮之全體也. 毫釐有差 則失於其中正 而各倚於一偏 其不可行 均矣.

내 생각으로는 엄하고 넉넉하며, 和하고 절제함, 이것은 이치의 自然이요, 禮의 전체이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중정을 잃어서 각각 한쪽으로 치우치니, 그 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가 말했다. “약속이 의리에 가까우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다. 공손함이 禮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종주로 삼을 수 있다.”

-信은 말이라고 해도 되고 약속이라고 해도 된다. 그것이 義에 가깝다면 행동으로 옮겨도 되지만, 義와 멀다면 말다운 말, 약속다운 약속이 아니다. 어찌 실천할 것인가?

-恭近於禮(공근어례): 공손함이 예에 가깝다면 모르거니와, 공손함이 예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아첨이나 굽실거림이 된다. 선비에게는 치욕이 될 뿐이다.

-因不失其親 亦可宗也(인부실기친 역가종야): 因을 依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친할 만한 사람이란 義와 禮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잃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義와 禮를 알아서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종주로 삼을 수 있다.


*信 約信也 義者 事之宜也. 復 踐言也. 恭 致敬也. 禮 節文也. 因 猶依也. 宗 猶主也.

信은 約信이며, 義라는 것은 일의 마땅함이다. 復은 말을 실천하는 것이다. 恭은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다. 禮는 節文이다. 因은 依와 같다. 宗은 主와 같다.

-約信(약신): 『禮記』「曲禮」에 約信曰誓라고 되어 있다. 約信이란 지키기로 맹서하는 것이니, 약속과 같은 뜻이다.


*言約信而合其宜則言必可踐矣, 致恭而中其節則能遠恥辱矣, 所依者不失其可親之人 則亦可以宗而主之矣.此言人之言行交際皆當謹之於始而慮其所終. 不然則因仍苟且之間將有不勝其自失之悔者矣.

약속을 하여 그것이 마땅함에 합치된다면 반드시 실천할 수 있고, 공손하되 절도에 맞으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의지한 자가 친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그를 높여 주인으로 삼을 만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언행과 교제가 다 마땅히 시작을 삼가고 마침을 생각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인습으로 인하여 구차한 중에 잘못하였다는 후회를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가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며,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바로잡으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군자가 추구하는 바가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不求安飽者 志有在而不暇及也. 敏於事者 勉其所不足 謹於言者 不敢盡其所有餘也. 然猶不敢自是 而必就有道之人 以正其是非 則可謂好學矣. 凡言道者 皆謂事物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이 (다른 데) 있어서 그런 것에 미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일에 민첩하다는 것은 부족한 바를 힘쓰는 것이며, 말을 삼가라는 것은 말의 말미까지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하지 않고 반드시 道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무릇 道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 사람이 누구나 함께 행하여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敏於事者 勉其所不足 謹於言者 不敢盡其所有餘也: 부족한 것은 덕행을 이르고 有餘함은 말을 이르는 바 『中庸』13장의 “부족하기 쉬운 것은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으며, 유여하기 쉬운 것은 감히 다하지 못한다.”(有所不足不敢不勉 有餘不敢盡)는 내용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成百曉


*尹氏曰 “君子之學 能是四者 可謂篤志力行者矣. 然不取正於有道 未免有差 如楊墨學仁義而差者也 其流至於無父無君 謂之好學 可乎?”

尹氏가 말했다. “군자의 學은 이 넷을 할 수 있다면 뜻을 돈독하게 하고 힘써 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가 있는 데 나아가 바로 잡지 않으면 차이가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楊朱(양주)와 墨翟(묵적)이 인의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라, 그 흐름이 無父無君에 이른 것과 같으니,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는가?”


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해도 교만함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그러나 가난해도 즐겁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


*諂 卑屈也 驕 矜肆也. 常人 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 而忘其貧 好禮則安處善 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諂(첨)은 낮추고 굽히는 것이다. 驕(교)는 자랑하고 방자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가난이나 부유함에 빠져서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가지 병폐가 있으니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면 스스로 지킬 줄 아는 것이나, 빈부의 바깥으로 초월하지는 못한 것이다. 보통 말하는 ‘可’라는 것은 겨우 괜찮지만 미진한 바가 있다는 말이다. 즐거워한다면 마음이 넓고 몸이 펴져서 그 가난함을 잊는 것이며, 禮를 좋아하면 善에 처함을 편안히 여기고 즐거이 도리를 쫓으니 또한 스스로 부유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子貢은 재물을 증식하여 먼저 가난했지만 나중에 부유해졌으나, 일찍이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데 힘쓴 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묻자, 夫子께서 이와 같이 답하신 것이다. 대개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힘쓰게 하신 것이다.

-胖(반): 편안하고 안락하다. 뚱뚱하다. 살지다. 위축됨이 없음.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자공이 말하였다. “시에 이르되, ‘자른 듯 간 듯, 쪼은 듯 간 듯’하다 하였으니, 그것이 이것을 말한 것입니까?”

-切磋琢磨(절차탁마) : 자를 절, 갈 마, 쪼을 탁, 갈 마. 윗 문장에 나오는 가난해도 즐기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함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 수양을 통해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詩 衛風淇奧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而益求其精也. 子貢 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로 引是詩以明之.

詩는 「衛風(위풍)」의 淇奧(기오)편이다. 뼈를 다루는 자는 자른 뒤에 다시 갈고, 옥석을 다루는 자는 쫀 뒤에 다시 갈아서, 이미 정밀하게 되었지만 더욱 정밀하게 되도록 함을 말한 것이다. 子貢은 스스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음으로써 지극하다고 여겼는데, 夫子의 말씀을 듣고 또 의리의 무궁하여 비록 얻음이 있으나 대번에 자족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시를 인용하여 밝힌 것이다.

-遽(거): 갑자기.

-詩는 『詩經』을 말한다. 이 시는 「衛風 淇奧篇」에 나온다. 風이란 풍습, 사회적 분위기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체로 사람들의 자연스런 심정을 읊은 것이 시이다. 그러므로 切磋琢磨의 본래의 뜻은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연모하는 그 사람의 외모가 깎아 만든 옥처럼 흠 잡을 데가 없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瞻彼淇奧 綠竹倚倚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僴兮 赫兮喧兮 有匪君子 終不可諼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矣. 告諸往而知來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賜(=子貢)는 비로소 함께 시를 말할 만하구나. 가는 것을 말하니 올 것을 아는구나.”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往이란 것은 이미 말한 것이요, 來라는 것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辯說而明矣라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而不察切己之實病也

내가 살펴보건대, 이 章의 문답은 그 얕고 깊음, 높고 낮음이 굳이 辨說을 기다리지 않고도 명확하다. 그러나 자르지 않으면 가는 것을 베풀 곳이 없고, 쪼지 않으면 가는 것을 둘 곳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비록 작은 성취에 안주해서 道의 극치에 나아감을 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나, 또한 虛遠(허원)한 데 달려서 자기에게 간절한 실제의 병통을 살피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騖(무): 달리다, 힘쓰다, 노력하다.


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尹氏曰 “君子 求在我者. 故不患人之不己知. 不知人 則是非邪正 或不能辨 故以爲患也.”

尹氏가 말했다. “君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한다. 그러므로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남을 알지 못하면 是非와 삿되고 바름을 혹 분별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不己知는 不知己이다.

-求在我者(구재아자): 在를 어조사로 보아, ‘나에게서 구하는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남이 알아주지 않음이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원인이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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