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논 어

論語集註 八佾篇 8, 9, 10, 11

서원365 2016. 12. 17. 10:47

8.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가 물었다.

“‘예쁜 웃음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 또렷한 눈동자, 흰 비단에 채색을 한다.’라고 하니 무슨 말입니까?”

-倩(천): 예쁘다. 여기서는 보조개라는 뜻. -盼(반) : 눈 예쁠 반, 눈 또렷한 반.

-絢(현): 문채 날 현, 무늬 순


*此逸詩也. 倩 好口輔也. 盼 目黑白分也. 素 粉地 畫之質也. 絢 采色畫之飾也. 言人有此倩盼之美質 而又加以華采之飾 如有素地而加采色也. 子夏疑其反謂以素爲飾 故問之.

이것은 수록되지 않은 시이다. 倩(천)은 예쁜 보조개이다. 盼(반)은 눈이 검고 흰 것이 분명한 것이다. 素(소)는 분칠하는 자리이니 그림의 바탕이다. 絢(현)은 채색이며 그림의 꾸밈이다. 사람이 예쁜 보조개와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바탕을 가지고 있고 또 화려한 채색의 꾸밈을 더하는 것이니, 마치 흰 바탕에 채색을 더하는 것과 같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子夏는 도리어 “흰 비단으로써 꾸민다.”고 말하는 것으로 의심하여서 여쭌 것이다.

-逸詩(일시): 시경에 수록되지 않은 시라는 뜻.


•子曰 繪事後素

공자가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한 뒤에 하는 것이다.”


*繪事 繪畫之事也. 後素 後於素也. 考工記曰 “繪畫之事後素功.” 謂先以粉地爲質 而後施五采, 猶人有美質 然後可加文飾.

繪事(회사)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後素(후소)는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것이다. 『周禮』「考工記」에 말하였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한 뒤에 한다.” 먼저 흰 비단을 바탕으로 한 뒤에 다섯 채색을 하니, 사람에게 아름다운 바탕이 있은 뒤에 화장을 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繪(회) 그림, 그리다.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是可與言詩已矣.”

말하되

“禮가 뒤이겠군요.”

공자가 말했다.

“나를 일으키는 사람은 商이구나. 비로소 함께 시를 말 할 만하구나.”


*禮必以忠信爲質 猶繪事必以粉素爲先. 起 猶發也. 起予 言能起發我之志意.

禮는 반드시 忠과 信으로써 바탕으로 하니 그림 그리는 일에 반드시 흰 비단을 먼저 하는 것과 같다. 起는 분발과 같다. 나를 일으킨다는 것은 나의 뜻을 일으켜 분발케 한다는 뜻을 말한다.


*謝氏曰 子貢因論學而知詩 子夏因論詩而知學 故皆可與言詩.

謝氏가 말했다. “子貢은 學을 논함으로써 詩를 알고, 子夏는 詩를 논함으로써 學을 아니, 그러므로 모두 더불어 詩를 말할 만하다.”


*楊氏曰 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 可以學禮 苟無其質 禮不虛行. 此‘繪事後素’之說也. 孔子曰‘繪事後素’, 而子夏曰‘禮後乎’, 可謂能繼其志矣. 非得之言意之表者能之乎? 商賜可與言詩者以此. 若夫玩心於章句之末 則其爲詩也固而已矣. 所謂起予 則亦相長之義也.”

楊氏가 말했다. “단 맛은 調味를 받아들이고, 흰색은 채색을 받아들이며, 忠과 信이 있는 사람은 禮를 배울 수 있으니, 진실로 그 바탕이 없다면 禮는 헛되어 행해지지 않는다. 이것이 繪事後素의 설명이다. 孔子께서 繪事後素를 말씀하시자 子夏가 禮後乎를 말하니, 그 뜻을 잘 계승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이것은 말씀한 뜻의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면 가능하겠는가? 商(子夏)과 賜(子貢)가 더불어 시를 말할 만 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章句의 지엽적인 것에만 몰두하면 그 詩를 함이 고루할 뿐이다. 소위 나를 일으킨다는 것은 또한 서로 성장시킨다는 뜻이다.”

-玩(완): 희롱하다, 익숙하다. 익히다.

-여기서 말한 禮는 상대를 존중하는 내면적인 마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측면, 절차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위에 林放(임방)이 예를 묻자 상례에서 절차에 따라 다스리기보다는 슬퍼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禮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忠, 信, 仁 등이다.


9. 子曰 "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 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라의 禮를 나는 말할 수 있지만, 杞나라가 족히 증명해주지 못한다. 은나라의 禮를 나는 말할 수 있지만 宋나라가 족히 증명해주지 못한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문헌이 충분하면 내가 내 말을 증명할 수 있다.”

-夏는 중국 전설의 나라이다. 하나라가 망하고 그 후예들을 봉한 것이 杞(기)나라이며, 殷이 망하고 그 후예들을 봉한 것이 宋(송)나라이다. 제사를 잇게 하기 위해 제후로서 세워준 것이다.


*杞夏之後. 宋殷之後. 徵 證也. 文 典籍也 獻 賢也. 言二代之禮 我能言之, 而二國不足取以爲證 以其文獻不足故也. 文獻若足 則我能取之 以證吾言矣.

杞(기)는 夏나라의 후손이고, 宋 은 殷나라의 후손이다. 徵(징)은 증명이다. 文은 典籍(전적)이고 獻(헌)은 賢(현)이다. 2대의 禮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두 나라에서 취해서 증명하기가 부족하니, 문헌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이 충분하다면 이는 그것을 취해서 내 말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10.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禘(체) 제사 때 降神(강신)하고 나서부터는 나는 보고 싶지 않다.”

-灌(관): 물 대다. 따르다. 붓다.

-禘(체): 제사 이름, 왕이 시조부터 그 이후의 왕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趙伯循曰 “禘 王者之大祭也. 王者旣立始祖之廟 又推始祖所自出之帝 祀之於始祖之廟, 而以始祖配之也. 成王以周公有大勳勞, 賜魯重祭. 故得禘於周公之廟, 以文王爲所出之帝 而周公配之, 然非禮矣.”

趙伯循(匡)이 말했다. “禘(체)는 王者의 큰 제사이다. 王者가 이미 시조의 사당을 세워 또 시조가 나온 임금을 미루어 시조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시조를 배향한다. 성왕은 주공에게 큰 공훈과 노고가 있다고 하여 노나라에 다시 제사를 내렸다. 그래서 주공의 사당에서 褅제사를 지내고, 문왕으로부터 나온 바의 임금으로 삼아 주공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예가 아니다.”

-趙匡(조광): 중국 당(唐) 나라의 학자. 담조(啖助)의 문인(門人), 『春秋』에 조예가 깊어 『春秋集傳纂例』저술, 『五經正義』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宋나라 儒學에 영향을 미침.


*灌者 方祭之始 用鬱鬯之酒灌地 以降神也. 魯之君臣 當此之時 誠意未散 猶有可觀, 自此以後 則浸以懈怠而無足觀矣. 蓋魯祭非禮 孔子本不欲觀, 至此而失禮之中又失禮焉 故發此歎也.

灌이란 막 제사가 시작함에 鬱鬯(울창) 술을 땅에 부어 신이 강림하게 하는 것이다. 노나라의 君臣이 이때까지는 성의가 흩어지지 않아서 그래도 볼만하지만, 이때부터 이후로는 점차 게을러져서 볼만한 것이 없었다. 대개 魯나라 제사가 예가 아니어서 孔子께서 보고 싶지 않으셨지만, 이에 이르러서는 失禮 중에도 또 失禮라 그래서 이런 탄식을 하신 것이다.


*謝氏曰 “夫子嘗曰 ‘我欲觀夏道, 是故之杞, 而不足徵也. 我欲觀商道 是故之宋 而不足徵也.’ 又曰 ‘我觀周道 幽․厲傷之, 吾舍魯何適矣. 魯之郊禘非禮也, 周公其衰矣.’ 考之杞宋已如彼, 考之當今又如此. 孔子所以深歎也.”

謝氏가 말했다. “夫子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내가 夏나라의 道을 보고자 하여, 그래서 杞(기)나라에 갔지만 증명하기에 부족했다. 내가 尙나라의 道를 보고자 하여, 그래서 宋나라에 갔지만 증명하기 부족했다.’ 또 말씀하셨다. ‘내가 周나라의 道를 보니 幽王과 厲王이 상하게 했다. 내가 魯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魯의 郊祭(교제)와 禘祭(체제)는 禮가 아니니, 周公의 예법도 쇠약했다.’ 杞나라와 宋나라를 살펴보니 저와 같고, 지금을 살펴보니 또 이와 같다. 孔子께서는 깊이 탄식하셨다.”


11. 或 問禘之說 子曰 “不知也. 知其說者至於天下也 其如是諸斯乎.” 指其掌

어떤 사람이 禘(체)제사의 내용에 대해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모르겠다.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천하를 다스림이 여기에 올려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을 가리켰다.

-諸는 至於를 줄인 것이다. ‘저’라고 읽는다.


*先王報本追遠之意 莫深於禘. 非仁孝誠敬之至 不足以與此 非或人之所及也, 而不王不禘之法 又魯之所當諱者, 故以不知答之.

先王이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뜻은 褅제사보다 깊은 것이 없다. 仁과 孝와 誠과 敬이 지극하지 않으면 이에 참석하기에 부족하니,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며, 왕이 아니면 褅제사를 지내는 것이 법이 아닌데, 또 노나라에서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이기에, 그래서 알지 못하겠다고 답하신 것이다.


*示 與視同. 指其掌 弟子記夫子言此而自指其掌 言其明且易也. 蓋知禘之說, 則理無不明 誠無不格 而治天下不難矣. 聖人於此 豈眞有所不知也哉.

示는 視와 같다. 손바닥을 가르침은 夫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스스로 자기 손바닥을 가리키셨다고 제자가 기록한 것이니, 그것이 명확하고 쉽다는 것을 말한다. 禘 제사의 내용을 알면 이치가 분명하지 않음이 없고 정성이 감동시키지 않음이 없어서 천하를 다스림이 어렵지 않은 것이다. 성인께서 이에 대해 어찌 정말로 아시지 못함이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