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논 어

論語集註 里仁篇 6, 7, 8, 9, 10

서원365 2016. 12. 19. 08:27

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높이는 것이 없으며, 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은 仁을 행하는 데 不仁한 것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더하지 못하게 한다.”

-無以尙之(무이상지) : 尙(상)은 높이다. 仁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 없다는 뜻.


*夫子自言未見好仁者惡不仁者, 蓋好仁者眞知仁之可好 故天下之物無以加之, 惡不仁者眞知不仁之可惡, 故其所以爲仁者, 必能絕去不仁之事, 而不使少有及於其身. 此皆成德之事 故難得而見之也.

夫子께서 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신 것은,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참으로 仁이 좋아할 만한 것임을 알므로 세상의 사물이 이에 더할 것이 없고, 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은 不仁이 참으로 미워할 만한 것임을 알므로 仁을 하는 사람은 不仁한 일을 반드시 거절할 수 있어서 조금도 자기에게 미치지 못하게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모두 덕을 이룬 일이므로 얻어 보기가 어렵다.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하루라도 仁에 힘을 쓴 사람이 있는가?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我未見力不足者(아미견력부족자): 仁에 힘을 쓰는 데 힘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즉, 인은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힘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은 아니다.


*言好仁惡不仁者 雖不可見 然或有人果能一旦奮然用力於仁 則我又未見其力有不足者. 蓋爲仁在己 欲之則是 而志之所至, 氣必至焉. 故仁雖難能, 而至之亦易也.

仁을 좋아하고 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은 비록 볼 수 없지만, 혹 어떤 사람이 과연 하루아침에 仁에 분연히 힘을 쓴다면 나는 또 그가 힘이 부족함을 보지 못했다고 하신 것이다. 대개 仁을 함은 자기에게 있어서 하고자 하면 바로 되고, 뜻이 지극한 바에 기운이 반드시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仁은 비록 능하기는 어려우나 이르기는 또한 쉽다.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아마 있을 것인데, 내가 보지 못했는가?”

-蓋(개) : 의문사, 아마 ~인가?


*蓋 疑辭. 有之 謂有用力而力不足者. 蓋人之氣質不同 故疑亦容或有此昏弱之甚, 欲進而不能者, 但我偶未之見耳. 蓋不敢終以爲易, 而又歎人之莫肯用力於仁也.

蓋는 의문사이다. 有之는 힘을 씀에 부족한 자가 있음을 이른다. 대개 사람은 기질이 같지 않으므로 또한 어둡과 약함이 심해서 나아가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자가 혹시나 있을 것인데 다만 내가 우연히 보지 못했을까 의심하신 것이다. 감히 끝내 쉽게 여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仁에 힘쓰는 것을 즐겨하지 못함을 탄식하셨다.

-偶(우): 우연.


*此章言仁之成德 雖難其人, 然學者苟能實用其力, 則亦無不可至之理. 但用力而不至者, 今亦未見其人焉. 此夫子所以反覆而歎惜之也.

이 章은 仁의 德을 이룬 그런 사람은 비록 어렵지만, 그러나 배우는 사람이 그 힘을 참으로 쓸 수 있다면 이르는 것이 불가할 이치가 없다. 다만 힘을 써도 이르지 못하는 자, 그런 자를 지금 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夫子께서 반복해서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신 까닭이다.

-사람이 도리를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런데도 도리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각자의 욕심이 도리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누르고 도리를 따라야 하는 강한 동기가 필요하며, 그 동기를 유발하게 하는 원인을 제시하지 못하면, 아무리 도리를 따르라고 해도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특히 물질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익을 버리고 도리를 따르게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 것은 선비들이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은 사회 제도를 갖추고 물산을 풍부하게 해서, 계층 격차가 적게 나게 하고,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도록 해야 할 책무가 국가에 있는 것이다.

老子가 지적하였듯이 각종 제도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차별을 만들고 나서 도리를 따르게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7.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허물이라는 것은 그 類(류)대로 하니, 허물을 보면 仁한지 알 수 있다.”

-過失(과실)도 그 수준대로 하니, 과실을 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어, 仁不仁(인불인)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黨 類也.

黨은 동류이다.


*程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類. 君子常失於厚 小人常失於薄, 君子過於愛, 小人過於忍.”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과실은 그 類대로 하니, 군자는 후함에 과실이 있고, 소인은 薄(박)함에 과실이 있다. 군자는 사랑함에 지나치고, 소인은 잔인함에 지나치다.”


*尹氏曰 “於此觀之 則人之仁不仁可知矣.”

尹氏이 말했다. “이것에 보면 사람이 어진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吳氏曰 “後漢吳祐謂 ‘掾以親故 受汙辱之名, 所謂觀過知仁’是也.”

吳氏(棫)가 말했다. “後漢의 吳祐가 말한 ‘아전이 아버지를 위함 때문에 汚辱의 이름을 받았으니, 허물을 보면 어진지를 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掾(연): 아전, 하급 관리 -汙(오): 더럽다.

-吳祐(오우): 『後漢書』64권에 보면, 字는 季英이다, 陳留長垣(진류장원) 사람이다.

-吳祐가 膠東侯相으로 있을 때 그의 아래에 하급 관리인 孫性이 있었는데, 그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아버지에게 옷 한 벌을 해주었다. 이를 안 孫性의 아버지가 아들을 꾸짓고 상관에게 옷을 돌려주고 사실대로 알렸다. 이를 보고 吳祐가 “觀過知仁”이라고 하고 그 옷을 다시 孫性의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成百效


*愚按 此亦但言人雖有過, 猶可卽此而知其厚薄, 非謂必俟其有過, 而後賢否可知也.

내가 살펴보건대, 이 또한 다만 사람이 비록 허물이 있어서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그 후하고 박한 것을 알 수 있음을 말씀하셨을 뿐이며, 반드시 그 허물을 기다린 뒤에야 어진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음을 이르신 것은 아니다.


8. 子曰 “朝聞道 夕死 可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道者, 事物當然之理. 苟得聞之, 則生順死安 無復遺恨矣. 朝夕 所以甚言其時之近.

道란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다. 참으로 들을 수 있다면 살아서는 따르고 죽어도 편안하니 다시 남길 한이 없다. 朝夕은 그때가 가까움을 심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程子曰 “言人不可以不知道 苟得聞道 雖死可也.” 又曰 “皆實理也, 人知而信者爲難. 死生亦大矣 非誠有所得, 豈以夕死爲可乎?”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도를 알지 못하먄 안되니 참으로 道를 들을 수 있다면 비록 죽어도 좋다고 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다 참된 이치이니, 사람이 이것을 알아서 믿는 것이 어렵다. 죽고 사는 것 또한 크니, 참으로 얻은 바가 있지 않다면 어찌 저녁에도 죽어도 괜찮다고 하겠는가?”

-孔子가 알고자 했던 道란 무엇일까? 이미 그는 仁과 禮樂, 忠과 信, 義, 智 등을 제시했고, 그게 바로 실천해야 할 道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러한 것을 실천하게 할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바른 인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실천하게 할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교육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교육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석가는 인과응보와 윤회를 주장하여 실천하게 하였고, 예수는 신의 심판을 주장했다. 그러나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 孔子는 그런 방법을 마땅하게 여길 수 없었을 것이다.


9. 子曰 “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는 道(도)에 뜻을 두니,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사람과는 함께 道(도)를 말할 수 없다.”

-군자가 꼭 가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그것을 도리가 아닌 방법으로 벗어나서는 안 되며, 가난하다고 해서 그것을 창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군자는 인격을 갖추는 것, 학문에 열중하여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본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여김은 본업보다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것이 자랑은 아니다. 자기 노력으로 충분히 가난을 면할 수 있음에도 게을러서 가난을 면치 못하고 남에게 신세를 진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心欲求道 而以口體之奉不若人爲恥 其識趣之卑陋甚矣 何足與議於道哉?

마음으로 道를 구하고자 한다면 입과 몸을 봉양함이 남만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그 인식과 취지가 비루함이 심하니 어찌 함께 道에 대해서 말할 만하겠는가?


*程子曰 “志於道而心役乎外 何足與議也.?”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뜻이 도에 있으면서 마음이 외물에 부림을 당하면 어찌 더불어 말할 만 하겠는가?”


10.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천하에 주장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으니, 義와 함께 할 뿐이다.”

-無適也 無莫也(무적야 무막야): 適은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莫은 그 반대이다. 이는 개인적인 입장이나 이익 및 감정을 좇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適 專主也. 春秋傳曰“吾誰適從”是也. 莫 不肯也. 比 從也.

適(적)은 오로지 주장함이다. 『春秋』「左氏傳」에 “나는 누구를 따를 것인가?”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莫은 긍정하지 않음이다. 比는 따름이다.


*謝氏曰“適 可也. 莫 不可也. 無可無不可 苟無道以主之, 不幾於猖狂自恣乎? 此佛老之學, 所以自謂心無所住而能應變 而卒得罪於聖人也. 聖人之學不然 於無可無不可之間, 有義存焉. 然則君子之心 果有所倚乎?”

謝氏가 말했다. “適은 된다이고, 莫은 안 된다이다. 된다고 함도 없고 안 된다고 함도 없으니, 참으로 道없음을 주장한다면, 거의 미치거나 스스로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부처와 노자의 학에서 스스로 마음이 머무는 바 없이 변화에 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어서 졸지에 聖人에게 죄를 얻는 것이다. 聖人의 학은 그렇지 않으니 가함과 불가함 사이에 義가 존재해 있으니, 과연 치우치는 바가 있겠는가?”

-猖(창): 미치다.

-이 역시 佛家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냄과 도가의 無爲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다. 兩家에서 말하는 것이 그가 말한 대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謝良佐가 말한 대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 불가의 종지라면 뭣 때문에 자비를 말하고, 계율을 말한 것인가? 또한 노자가 왜 인위를 버리고 자연의 이치에 따르라고 할 것인가? 이것저것 따를 것을 말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라고 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