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논 어

論語集註 公冶長 18, 19, 20, 21

서원365 2016. 12. 20. 22:35

18. 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子張(자장)이 물었다.

“令尹(영윤) 子文(자문)은 세 번 영윤이라는 벼슬을 했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그만두었지만 화내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舊(구) 令尹의 政事를 新 令尹에게 반드시 말해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충성스럽다.”

“어집니까?”

“모르겠다. 어찌 어질 수 있으랴.”

-子文이 어진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것으로 仁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공자는 子文을 忠하지만 仁한 것은 모르겠다고 하였다.

-舊令尹之政(구령윤지정): 子文 자신이 한 일을 말한다. 必以告新令尹(필이고신영윤)이라고 한 것은 이를 새 영윤에게 인수인계하였다는 말이다. 이를 보면 子文이 일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令尹 官名 楚上卿執政者也. 子文 姓鬪, 名穀於菟. 其爲人也, 喜怒不形 物我無閒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 其忠盛矣, 故子張疑其仁. 然其所以三仕三已而告新令尹者, 未知其皆出於天理而無人欲之私也, 是以夫子但許其忠, 而未許其仁也.

令尹은 관직 이름이며, 초나라 上卿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子文은 성이 鬪(투)이며 이름이 穀於菟(곡어토)이다. 그의 사람됨이 기쁨과 성냄을 나타내지 않았고, 남과 내가 간격이 없어서 나라가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몰라서 충성이 컸으므로 子張이 그가 어진지 의심했었다. 그러나 세 번 벼슬하고 세 번 그만 둠에 신임 令尹에게 알린 것으로써 그 모두가 天理에서 우러나와 사람의 사적인 욕망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夫子께서 다만 그의 충성은 인정하셨지만, 그의 어짊은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崔子弑齊君 陣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 曰 “未知. 焉得仁?”

“崔子(최자)가 齊(제)나라 임금을 죽이자, 陣文子(진문자)는 말 십승이 있었지만 버리고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 그리고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또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하고는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맑다.”

“어집니까?”

“모르겠다. 어찌 어질 수 있으랴.”

-淸矣(청의): 陣文子(진문자)는 힘에 굴복하지 않았고, 몸을 더럽히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를 떠났다. 그래서 깨끗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仁 (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陣文子는 제나라에 있을 때 역적을 토벌하지 못했으며, 몇 년 뒤에 다시 제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崔子 齊大夫 名杼. 齊君 莊公 名光. 陳文子, 亦齊大夫, 名須無. 十乘 四十匹也. 違 去也. 文子潔身去亂 可謂清矣, 然未知其心果見義理之當然, 而能脫然無所累乎 抑不得已於利害之私, 而猶未免於怨悔也. 故夫子特許其清, 而不許其仁.

崔子(최자)는 齊 大夫 이름은 杼(저)이다. 齊나라 군주는 莊公이며 이름은 光이다. 陣文子(진문자) 역시 齊의 大夫 이름은 須無(수무)이다. 十乘은 40필이다. 違는 떠남이다. 文子는 몸을 깨끗이 하여 어지러운 나라를 떠났으니 깨끗하다고 이를 만하나, 그 마음이 과연 의리의 당연함을 보아서 벗어버리고 얽매임이 없게 한 것인지, 아니면 利害의 사적인 것에 부득이해서 오히려 원망과 후회를 면치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그가 깨끗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어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愚聞之師曰 “當理而無私心, 則仁矣. 今以是而觀二子之事 雖其制行之高若不可及, 然皆未有以見其必當於理 而眞無私心也. 子張未識仁體 而悅於苟難, 遂以小者信其大者, 夫子之不許也宜哉.”

내가 스승에게서 들었다. “이치에 합당하고 사심이 없으면 仁이다. 지금 이로써 두 사람의 일을 살펴보면 비록 행동을 법도에 맞게 제어함이 높음은 미칠 수 없지만, 다 반드시 이치에 맞게 하여 사심이 정말로 없는가는 볼 수 없다. 子張이 仁의 본체를 알지 못하고 어려운 일을 구차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고, 작은 것을 따라서 큰 것을 믿으니, 夫子께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하다.”


*讀者於此, 更以上章“不知其仁” 後篇“仁則吾不知”之語并與三仁夷齊之事觀之, 則彼此交盡, 而仁之爲義可識矣. 今以他書考之, 子文之相楚 所謀者無非僭王猾夏之事. 文子之仕齊 旣失正君討賊之義, 又不數歲而復反於齊焉, 則其不仁亦可見矣

이것을 읽는 자는 다시 위 章에서 “그가 어진지는 알지 못하겠다.” 후편에 “仁이라면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과 더불어 三仁(微子, 箕子, 比干)과 伯夷 叔齊의 일로 살펴본다면, 저것과 이것을 다하여서 仁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다른 책으로 고찰하건대, 子文이 楚나라를 도울 때 도모한 것이 모두 왕(天子)을 참람하고 중국을 어지럽게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文子가 齊나라에 벼슬할 때 이미 군주를 바르게 하고 亂賊을 토벌하는 의리를 잃었고 또 몇 년이 못 되어 齊나라로 돌아갔으니 어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猾(활): 교활하다. 어지럽히다.

-後篇(후편): 「憲問篇」第2章 克伐怨欲 不行焉 可以爲仁矣. 子曰 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

(“이기고 자랑하고 원망하고 욕심내는 것을 하지 않으면 仁이 될 수 있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어려운 것이 될 수는 있지만 仁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三仁(삼인): 「微子篇」1章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微子(미자)는 떠나고, 箕子(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比干(비간)은 간하다 죽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에는 세 명의 어진 사람이 있다.”)

-夷齊(이제): 「述而篇」14章 (子貢이) 入曰 伯夷叔弟 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들어가서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옛 어진이다.” “원망하였습니까?” “仁을 구하여 仁을 얻었으니, 또한 무엇을 원망하였을까?”)


19.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 曰 “再斯可矣.”

季文子는 세 번 생각한 뒤에 실행하였다. 공자가 듣고 말하였다.

“두 번이면 된다.”

-子聞之(자문지): 季文子는 BC568년에 죽었고, 공자는 BC551년에 태어났으므로 이 말은 전해들은 것이다.

-斯(사): 여기서는 어조사로서 ‘~이면’의 뜻. 강조의 뜻이 있다.

-한 번 생각하고 행하다보면 실수하기 쉽고, 자꾸 생각하면 도리를 떠나 私心(사심)에 흔들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같은 일에 여러 번 생각하면 추진력이 약해져, 일을 이루어내기가 어렵게 된다.


*季文子 魯大夫 名行父. 每事必三思而後行, 若使晉而求遭喪之禮以行 亦其一事也. 斯 語辭.

季文子(계문자:BC651年?~BC568年)는 魯나라 大夫로서 이름은 行父(행보)이다. 매사에 반드시 세 번 생각하고 행하였으니, 예를 들어 晉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상을 만나는 禮를 구하여서 간 것이 또한 그 한 가지 사례이다. 斯는 어조사이다.

-季文子가 晉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진나라 임금이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喪을 당할 수 있으므로 喪을 당했을 때 사신으로서의 禮가 무엇인지 미리 알아보고 갔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주도면밀한 것이므로 칭찬할 일이지 결코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程子曰 “爲惡之人 未嘗知有思 有思則爲善矣. 然至於再則已審 三則私意起而反惑矣 故夫子譏之.”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惡을 하는 사람은 생각할 줄 알지 못하니, 생각이 있으면 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두 번 생각하는 데 이르면 이미 자세하고, 세 번이면 사적인 생각이 일어나 도리어 유혹되므로, 夫子께서 나무라신 것이다.”


*愚按 季文子慮事如此 可謂詳審, 而宜無過擧矣. 而宣公篡立 文子乃不能討 反爲之使齊而納賂焉, 豈非程子所謂私意起而反惑之驗歟. 是以君子務窮理而貴果斷, 不徒多思之爲尙.

내가 살펴보건대, 季文子가 일을 생각함이 이와 같았으니, 상세하게 살폈다고 이를 수 있어서 허물이 의당 없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宣公이 찬탈하여 자리에 서자 文子는 토벌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그를 위해서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뇌물을 바쳤으니, 어찌 程子께서 말씀하신 “사적인 뜻이 일어나 도리어 유혹된다.”는 실제가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군자는 窮理에 힘쓰고 果斷함을 귀하게 여기니, 다만 많이 생각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다.


20. 子曰 “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 不可及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甯武子(녕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

-邦無道則愚(방무도즉우): 甯武子(녕무자)는 衛(위)의 文公(문공)와 成公(성공) 때 벼슬하였다고 한다. 성공 때는 無道(무도)하여 나라를 상실하는 지경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들은 모두 숨어버렸지만, 甯武子는 몸을 숨기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위험을 피하지 않았으니 愚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몸도 보전하고 나라도 구했다. 그래서 미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甯武子 衛大夫 名俞. 按春秋傳, 武子仕衛 當文公成公之時. 文公有道 而武子無事可見, 此其知之可及也. 成公無道 至於失國 而武子周旋其閒 盡心竭力 不避艱險. 凡其所處 皆智巧之士所深避而不肯爲者 而能卒保其身以濟其君 此其愚之不可及也.

甯武子는 衛(위)의 大夫로서, 이름은 兪(유)이다. 『春秋左傳』을 살펴보건대, 武子는 衛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文公과 成公 때에 해당한다. 文公은 道가 있어서 武子가 볼만한 일이 없었으니, 이것은 그 지혜가 미칠 수 있었음이다. 成公은 無道하여 나라를 잃음에 이르자, 武子는 그 사이를 두루 돌면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어렵고 위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처하는 바를 모든 지혜롭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깊이 피하고 기꺼이 하지 않는 것인데, 마침내 자기 몸을 보전하고 그 군주를 구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程子曰 “邦無道能沈晦以免患, 故曰‘不可及也.’ 亦有不當愚者, 比干是也.”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잠기고 어두운 체 하여 환난을 피한다. 그러므로 미칠 수 없다고 하셨다. 또한 어리석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니 比干이 이것이다.”


21. 子在陳 曰 “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공자가 陳나라에 있으면서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우리 제자들은 뜻은 크나 일에는 간략하며, 빛나게 문리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맞게 다듬을 줄 모르는구나.”

-공자는 천하를 떠돌며 자기 뜻을 펴고자 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陳(진)에 있을 때 그 뜻을 거두는 장면이다. 그리고 제자 육성을 통해 그 뜻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此孔子周流四方 道不行而思歸之歎也. 吾黨小子 指門人之在魯者. 狂簡, 志大而略於事也. 斐 文貌. 成章, 言其文理成就, 有可觀者. 裁 割正也. 夫子初心 欲行其道於天下, 至是而知其終不用也. 於是始欲成就後學, 以傳道於來世. 又不得中行之士而思其次, 以爲狂士志意高遠, 猶或可與進於道也. 但恐其過中失正, 而或陷於異端耳, 故欲歸而裁之也.

이것은 孔子께서 사방을 주유하시다가 道가 행해지지 않자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면서 탄식하신 것이다. 吾黨小子는 魯나라에 있는 문인들을 가리킨 것이다. 狂簡(광간)은 뜻은 크지만 일에는 간략한 것이다. 斐(비)는 문채나는 모양이다. 成章은 文理가 성취되어 볼만한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 裁(재)는 베어서 바르게 하는 것이다. 夫子의 처음 마음은 그의 道를 천하에 실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쓰지 못함을 아신 것이다. 이에 비로소 후학을 성취시켜 오는 세상에 道를 전하려고 하셨다. 또 中行의 선비를 얻지 못하여 그 다음을 생각하셨으니, 狂士는 뜻이 高遠하여 혹 그와 함께 道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다만 그 중도를 넘어 바름을 잃어서 혹 이단에 빠질까 염려하셔서 돌아가 바르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斐(비): 아름답다. 문채나다. -中行(중행):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행실, 中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