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논 어

論語集註 雍也篇 1, 2

서원365 2016. 12. 21. 18:37

◎ 雍也 第六

*凡二十八章 篇內第十四章以前 大意與前篇同

모두 28장이다. 이 편 안에서 第14章 이전은 大義가 前篇과 같다.

-전편과 같다는 것은 인물평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1. 子曰 “雍也 可使南面.”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雍(옹)은 南面할 만 하다.”

-可使南面(가사남면): 군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한다. 南面(남면)이라는 말은 군왕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의 公冶長篇 4章에서 仲弓(중궁)이 仁한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仁한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南面者 人君聽治之位. 言仲弓寬洪簡重 有人君之度也.

南面이라는 것은 군주가 정치를 듣는 자리이다. 仲弓이 관대하고 넓고 소탈하고 중후하므로 군주의 도량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仲弓 問子桑伯子 子曰 “可也 簡.”

仲弓이 問子桑伯子(자장백자)에 대해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괜찮다, 간략하니.


*子桑伯子 魯人, 胡氏以爲疑卽莊周所稱子桑戶者是也. 仲弓以夫子許己南面 故問伯子如何. 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 簡者, 不煩之謂

子桑伯子는 魯나라 사람인데, 胡氏는 莊周가 말한 子桑戶가 그인 듯하다고 하였다. 仲弓은 夫子께서 자기를 南面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으므로 伯子는 어떤가라고 여쭈었다. 可란 근근이 괜찮지만 미진함이 있다는 말이다. 簡이란 번거롭지 않음을 이른다.


•仲弓曰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大(태)簡乎?”

仲弓이 말했다.

“敬에 있으면서 간략함을 행함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임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간략함에 있으면서 간략함을 행한다면 너무 간략한 것이 아닙니까?”

-簡(간)은 번거롭게 하지 않음이다. 만약 敬을 중심에 두고 簡을 행한다면 좋지만, 簡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簡하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고 묻고 있다.


*言自處以敬 則中有主而自治嚴, 如是而行簡以臨民 則事不煩而民不擾 所以爲可, 若先自處以簡, 則中無主而自治疏矣, 而所行又簡, 豈不失之太簡 而無法度之可守乎? 家語記伯子不衣冠而處 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蓋太簡者, 而仲弓疑夫子之過許與.

스스로 처하기를 敬으로써 한다면, 가운데 주장이 있어서 자기를 다스림이 엄격할 것이어서, 이와 같이 간략함을 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임한다면 정사가 번거롭지 않아서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으므로 괜찮으나, 만약 자기가 먼저 처함이 간략함으로 하면 중심에 주장이 없어서 자기를 다스림이 소홀 할 것이라, 행하는 바도 간략하면 어찌 너무 간략하여 잘못되어서 지킬만한 법도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孔子家語』에 伯子를 옷과 갓을 쓰지 않고 거처해서 夫子께서 그가 人道를 牛馬와 같이 하고자 했다고 나무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즉 伯子는 너무 간략 사람이어서 仲弓이 夫子께서 너무 인정하시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子曰 “雍之言 然.”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雍의 말이 옳다.”


*仲弓蓋未喻夫子可字之意, 而其所言之理 有默契焉者, 故夫子然之.

仲弓이 夫子의 可라는 글자의 뜻을 깨닫지 못했으나, 그가 말한 이치가 은연중에 계합함이 있었으므로 夫子께서 그렇다고 하신 것이다.


*程子曰 “子桑伯子之簡 雖可取而未盡善 故夫子云可也. 仲弓因言內主於敬而簡 則爲要直, 內存乎簡而簡 則爲疏略, 可謂得其旨矣.”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子桑伯子의 소탈함이 비록 취할 만하나 아주 좋지는 않으므로 夫子께서 괜찮다고 하신 것이다. 仲弓이 (공자의 말로) 인하여 안으로 敬을 주로 하면서 간략하면 긴요하고 바른 것이 되지만, 안으로 간략함을 두고서 간략하면 소홀하고 간략한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그 뜻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又曰 “居敬則心中無物 故所行自簡, 居簡則先有心於簡 而多一簡字矣, 故曰太簡.”

또 말씀하셨다. “경에 머물면 마음에 아무 일이 없으므로 행하는 바가 저절로 간략하게 되지만, 간략함에 머물면 먼저 마음이 간략함에 있으니 簡이라는 한 글자가 많게 되므로 너무 간략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간략 그 자체에 집착하여 너무 간략하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실질적인 마음과 격식이 있는 바, 실질적인 마음이 있으면서 격식을 줄이는 것은 잘못됨이 없지만, 실질적인 마음도 없으면서 격식을 줄이는 것에 열중하면 남는 것이 없게 된다.


2.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哀公(애공)이 물었다.

“제자 중 누가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까요?”

공자가 대답했다.

“顔回(안회)라는 사람이 있어 배우기를 좋아했으니, 성냄을 옮기지 않고, 과실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을 듣지 못했습니다.”

-不遷怒 不貳過(불천노 불이과): 다른 사람에게서 화나는 일이 있어 나쁜 기분이 있어도 그것을 제 삼자에게 나타내지 않았으며,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

-好學(호학): 배움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글이다. 배움이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미치지 않으면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


*遷 移也. 貳 復也. 怒於甲者 不移於乙, 過於前者 不復於後. 顏子克己之功至於如此, 可謂眞好學矣. 短命者 顏子三十二而卒也. 旣云今也則亡 又言未聞好學者, 蓋深惜之, 又以見眞好學者之難得也.

遷(천)은 옮김이다. 貳는 다시이다. 갑에게 노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으며, 앞에서 잘못한 것을 뒤에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顔子께서는 자기를 이긴 공부가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만 하다. 단명이란 顔子께서 32세에 별세하신 것이다. 이미 지금은 없다고 하시고 다시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을 듣지 못했다고 하신 것은 깊이 애석해 하신 것일 것이며, 또 참으로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가 어려움을 나타내신 것이다.


*程子曰 “顏子之怒 在物不在己 故不遷. 有不善未嘗不知, 知之未嘗復行 不貳過也.”

程子(伊川)께서 말씀하셨다. “顔子의 성냄은 남에게 있고 자기에게 있지 않았으므로 옮기지 않으신 것이다. 선하지 않음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함이 없고, 알기에 일찍이 다시 행함이 없으니 다시 허물을 짓지 않으신 것이다.”


*又曰 “喜怒在事 則理之當喜怒者也 不在血氣則不遷. 若舜之誅四凶也 可怒在彼 己何與焉? 如鑑之照物 妍媸在彼 隨物應之而已 何遷之有?”

또 말씀하셧다. “기뻐함과 성냄이 일에 있으면 도리로 마땅히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며, 혈기에 있지 않으면 옮기지 않는다. 예를 들면 순임금이 四凶을 벌함에 노할 만 한 것이 상대에 있었지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거울이 물건을 비춤에 곱고 거친 것이 저것에 있어서, 물건에 따라 응하는 것일 뿐이나 어찌 옮김이 있을 것인가?”

-共工, 驩兜(환도), 三苗(삼묘), 鯤(곤). 순임금이 이들을 귀양 보내거나 참하자 국가 안정되었다고 한다.

-媸(치): 거칠다.


*又曰 “如顏子地位 豈有不善. 所謂不善 只是微有差失 纔差失便能知之 纔知之便更不萌作.”

또 말씀하셨다. “顔子의 경지로서 어찌 不善이 있겠는가? 이른바 不善이라고 한 것은 다만 약간의 잘못이 있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곧 능히 알고, 알면 곧 다시 싹이 트지 않게 한 것이다.”

-纔(재): 겨우


*張子曰 “慊於己者 不使萌於再.”

張子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에 (도리상) 차지 아니한 것이 다시는 싹트지 않게 하는 것이다.”

-慊(겸): 마음에 흐뭇하지 않다.


*或曰 詩書六藝, 七十子非不習而通也, 而夫子獨稱顏子爲好學, 顏子之所好 果何學歟. 程子曰 學以至乎聖人之道也.

어떤 사람이 말했다. “詩書六藝를 70제자가 익혀서 통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夫子께서 顔子만을 배움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셨으니, 顔子께서 좋아하신 것이 과연 어떤 배움인가?” 程子가 말씀하셨다. “배워서 聖人의 道에 이르는 것이다.”


*學之道奈何. 曰 天地儲精 得五行之秀者爲人 其本也眞而靜. 其未發也五性具焉, 曰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懼‧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故學者約其情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而已. 然必先明諸心 知所往 然後力行以求至焉. 若顏子之非禮勿視聽言動 不遷怒貳過者 則其好之篤而學之得其道也. 然其未至於聖人者 守之也 非化之也.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今人乃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所以爲學者 不過記誦文辭之間 其亦異乎顏子之學矣.

(정자와의 대화가 이어짐) “배우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程子가) 말씀하셨다. “천지가 精氣를 쌓아 五行의 빼어난 것을 얻어 사람이 되니, 그 본체는 참되고 고요하다. 그것이 발현되지 않았을 때는 五性이 갖추어져 있으니, 仁義禮智信이다. 형태가 이미 생기고 나면 외물이 그 형태에 접촉하여 마음이 움직이니, 그 마음이 움직여 七情이 나오니 喜怒哀懼愛惡欲이다. 情이 치성하여 더욱 방탕해지면 본성이 뚫리게 된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情을 단속하여 중도에 합하게 하고 그 마음을 바라게 하여 본성을 기를 뿐이다. 그러나 먼저 마음을 밝혀서 가는 바를 안 뒤에야 힘써 행하여 道에 이르기를 구해야 한다. 顔子의 경우는 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아서 성냄을 옮기거나 다시 잘못을 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좋아함이 독실하고 배움에 그 방법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성인에 이르지 못한 것은 지킨 것이며,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명을 연장하였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에 성인은 본래 나면서 아는 것이며, 배워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배우는 것이 글을 기억하고 외우고 짓는데 불과하니 또한 顔子의 배움과는 다른 것이다.”

-鑿(착): 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