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정희창
민음사(2017. 서울)
니체(1844-1900)는 19세기 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독일의 19세기 후반은 국가주의와 기독교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이다. 기독교와 국가에 의해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강요되었고, 그것이 유일한 정답인 것처럼 주장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니체에게는 숨 막히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대부분 작은 주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란 말로 끝난다. 니체는 자신을 차라투스트라로 등장시켜 자기 생각을 펼쳐나가지만, 실제의 차라투스트라와 내용은 아무 관계없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니체는 말한다. 각자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초인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나’가 된다. 종교에 의해 주입되거나 강요된 것, 국가에 의해 주입되거나 강요된 것, 그것에 갇혀 있는 존재로서 살아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 유일신이 등장했을 때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죽었다. 이제 초인에게 신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이다.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하늘나라에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마라.” “내가 꾸며낸 이 신은 다른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인간의 망상이었다.”그것은 인간을 구속할 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성직자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이며, 낙인찍힌 자들이다,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 놓았다.” 그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착한 자나 악한 자나 다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끝없이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도달해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정하고 그쪽으로 건너가는 존재이다. 다리[橋梁]와 같은 존재. 정상을 향하여 끝없이 올라가는 존재. 현재의 나를 극복하는 존재.
그렇다면 정상은 어떤 모습인가? “가장 높은 산들은 어디서 오는가라고 나는 일찍이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웠다.” 바다 속의 심연. 그것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그것은 “그대 본래의 모습 그대로 되는 것”이다. 춤출 줄 알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매한 것, 경건한 것, 참회자, 이런 것은 매우 추한 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대부분 지역에서 종교와 국가에 의해 사람들은 갇혀서 살았다. 특히 유일신을 강조하던 유럽이나 중동 지역은 매우 심했다. 이로부터 탈출하려는 니체의 행위는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그런 것들이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정답이 없다는 말은 스스로 그 정답을 만들어 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정답으로 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남들이 그들의 정답을 만들어가는 것은 방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