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야기 ■/책이야기

내 이름은 빨강

서원365 2019. 12. 31. 22:26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이난아

민음사(서울 2011 2판)



변화는 지루함을 없애주고, 기대감과 희망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큰 불안과 공포를 주기기도 한다. 특히 그 동안 그 사회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변화일 경우에는 그 변화를 수용하거나 동참하는 경우에는 죄책감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특히 그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종교적이어서 신성시되는 때에 이에 반하는 새로운 변화가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 심각한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다. 종교적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는 자꾸만 옛것에로 회귀하게 만들고 그 속에 사람들을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다.


세밀화란 책 속의 글과 관련되어 그 책에 삽입되는 그림을 말하는 것 같다. 이스탄불에는 궁정화원에 이런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술탄의 명을 받들어 세밀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아 양성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념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자신이 본 것이 아니라 신이 본 것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신이 본 것을 그리지 않고 유럽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화원장 오스만은 유럽인과 베네치아인 화가들을 모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의미의 세계가 끝나고 형식의 세계가 시작될 거라고 말한다.


유럽은 신 중심 사고방식을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일어난 지 한참을 지났으며 전 분야에서 인본주의가 이미 정착된 상태였다. 에니시테 에펜디는 술탄을 설득하여 베네치아식 책을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 화원의 화가들인 엘레강스, 올리브, 황새, 나비 등이 일을 맡게 된다. 오스만은 이런 일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특히 올리브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전통적 방법에 따라 세밀화를 그리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점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올리브는 엘레강스와 에니시테를 살해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엘레강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12년 만에 돌아온 카라의 에니시태의 딸 세큐레와의 사랑 이야기가 함께 전개된다. 세큐레의 전남편은 전쟁에 나간 뒤 4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결국 세큐레는 법정에서 이혼을 승낙 받는다. 세큐레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인 하산은 세큐레 전남편의 남동생이다. 세큐레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엘레강스와 에니시테의 살인자를 찾는 카라의 추적, 변화에 대한 저항과 두려움, 이런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야기 전개는 매우 특이하다. 이야기 전개를 따라 한 사람씩 등장하여 1인칭 화법으로 이야기 전개와 자기 심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빨강이라는 색을 의인화하여 말을 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기법이 참신한 느낌을 준다.

종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사회에서의 생활 모습도 간혹 보여주며, 주제를 그림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킨 점도 독특하다. 이 소설이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장인들이지만, 자기 개성을 내세우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나이들어 눈이 머는 것이 자기 일에 대한 사명을 다한 징표로 삼아 눈멂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눈이 멀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 나이들어 눈이 멀지 않으면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회적 관념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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