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으로 가는 길
도종환
문학동네(경기, 2007. 1판 6쇄)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나비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네가 생각하기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모습의 벌레로 살았다 할지라도
누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온몸에 독기를 가시처럼 품고
음습한 곳을 떠돌았을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의 고통스러운 변신을
기뻐하는 것이다
네가 지금은 한 마리
작은 나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과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구두 수선집
길모퉁이 구두 수선집 의자에
그녀는 씀바귀처럼 앉아 있었다
뽀얀 얼굴에 가을볕이 내려와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줄기는 볼우물 그늘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녀가 오래 걷거나 서서 버티는 동안
그녀의 무게를 떠받치느라 발밑에서 조금씩
뭉개어진 흔적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겸연쩍은 듯 배시시 웃고 있었다
프랑스 휘장을 높이 단 대형 쇼핑몰 옥상 주차장에서
물건을 가득 사 실은 차량들이 줄지어 내려와
구두 수선집을 흘낏흘낏 쳐다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도 물건도 고장나기가 무섭게 버려지고
새것은 늘 대량으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
망가지면 다시 고쳐 신을 줄 아는 스물몇 살의 그녀
언제고 고장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고쳐서 다시 쓸 줄 알 것 같은 그녀가
바람에 몸을 흔들면 산박하 냄새가 날아오곤 하였다
○피반령
돌아보니 산은 무릎까지 눈밭에 잠겨 있다
담채처럼 지워져 희미한 능선
내려와서 보니 지난 몇십 년
자런 산들을 어찌 넘었나 싶다
희인 지나면 수리티재 또 한 고개
그러나 아무리 가파른 산도
길을 지니지 않은 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멀리 서서 보면 길보다
두려움이 먼저 안개처럼 앞을 가리지만
아무리 험한 산도
길을 품지 않은 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길은 바로 그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걸
*그의 시는 톡톡 튀거나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아서 좋다.
난해하지 않아서 좋다.
삶을 긍정하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그의 마음이 그래서 그럴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중고 서점에서 3700원에 샀다.
황송스러워 새 책을 다시 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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